2014-08-23. QT큐티체조.

간단설명. 바울은 자신의 방문이 고린도 교회에 근심이 될 것을 알고 눈물과 사랑의 편지로 대신하겠다고 밝히면서, 교회 안에 성도 사이에 생기는 근심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용서와 위로를 권고한다.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2:1-11
한글본문.
1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2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3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5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7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9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영어본문.
1 So I made up my mind that I would not make another painful visit to you. 2 For if I grieve you, who is left to make me glad but you whom I have grieved? 3 I wrote as I did so that when I came I should not be distressed by those who ought to make me rejoice. I had confidence in all of you, that you would all share my joy. 4 For I wrote you out of great distress and anguish of heart and with many tears, not to grieve you but to let you know the depth of my love for you. 5 If anyone has caused grief, he has not so much grieved me as he has grieved all of you, to some extent–not to put it too severely. 6 The punishment inflicted on him by the majority is sufficient for him. 7 Now instead, you ought to forgive and comfort him, so that he will not be overwhelmed by excessive sorrow. 8 I urge you, therefore, to reaffirm your love for him. 9 The reason I wrote you was to see if you would stand the test and be obedient in everything. 10 If you forgive anyone, I also forgive him. And what I have forgiven–if there was anything to forgive–I have forgiven in the sight of Christ for your sake, 11 in order that Satan might not outwit us. For we are not unaware of his schemes.

도움말.
근심(1절 등). 본 단락에서 명사형(뤼페)과 동사형(뤼페오)으로 아홉 번이나 쓰였다. 원문에는 여덟 번 사용되었다(우리말 성경에는 5절에서 중복 해석했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그리스도 앞에서는 어떤 역사가 이루어지는가(10절)?
⬇ 아래로 인간. 성도는 근심을 끼친 사람들을 벌한 후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가(7-8절)?
? 물어봐. 고린도 교회와 성도에 대한 바울의 사랑의 증거는 무엇인가(4절)?
! 느껴봐. 나는 용서와 위로와 사랑이 사탄의 계책을 깨뜨리는 효과적인 무기라는 사실을 확고히 믿는가?
➡ 옆으로 실천해. 오늘 내가 그리스도 앞에서 용서와 위로와 사랑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할 지체는 누구인가?

Meditation. 근심을 치유하는 묘약, 사랑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진 일전의 방문으로 인해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 사이에 상처와 근심거리들이 생겨났다. 바울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방문하려 했으나, 이것이 오히려 서로의 상처와 근심을 가중시켜서(3절) 양자 모두 사탄의 계책에 빠지게 할 수 있음을 간파하고(11절) 많은 눈물을 담아 쓴 편지만을 보낸다(4절). 그리고 그 편지 속에 근심으로 곪아가고 있는 관계망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랑(4, 8절)의 묘약을 전달한다. 특히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켜 징계 받은 사람의 마음속 근심에까지 그 사랑의 묘약을 풀어 녹여내어 공동체로 하여금 그리스도 앞에 바로 설 것을 권고한다.
공동체 안에서 생겨나는 모든 상처와 그로 인해 깊어가는 근심을 해소하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지식도, 회의도, 권징도 그 자체로 상처와 근심을 치유할 수는 없다.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가장 좋은 길은 분명 사랑이다(고전 13:13). 당신은 공동체 안에서 이러한 사랑의 묘약을 풀어 녹여내고 있는가? 공동체 안에 그 사랑의 약효가 필요한 곳은 어디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정답과 일치하는 선택.

1
가족 캠핑을 마치고 한 가정이 어두운 도로를 조심하며 커브를 꺾는 순간, 중앙선을 마주 달려오던 음주운전자의 차가 그의 가족을 덮쳤다. 조금 전까지 가족과의 행복한 시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편과 아이 셋만 남긴 채 사랑하는 아내와 셋째 아이, 그리고 어머니와는 먼 이별을 고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이란 저서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럴드 싯처의 삶의 이야기이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삶의 깊은 상실 앞에서 정말 정직하게 반응하며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울었던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우리는 어둠을 뒤로 하고 도망칠 수도 있고, 아니면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가 상실에 따른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기 연민에 빠져 살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이들과 마음을 함께하며 그들의 고통을 나 자신의 고통처럼 보듬어 줄 수도 있다. 슬픔으로부터 도망치느라 어딘가에 중독될 수도 있고, 아니면 슬픔과 벗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당한 기만의 상처들을 끌어안고 지낼 수도 있고, 아니면, 비록 그럴 이유가 없어 보인다고 해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 수도 있다. 악으로 악을 되갚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선으로 악을 이길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두드러지게 달라진다. 선택의 힘은 참으로 놀랍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간성에 존엄성이 더해지기도 하고, 상황을 딛고 일어설 줄 아는 능력을 얻게 되며, 희생자의 처지에서 자유롭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선택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선택을 내릴 능력도 있고 또 바른 선택을 내려야 하는 당위성도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우리가 내리는 선택은 종종 번민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쪽으로 이루어진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잔인하게도 삶은 때때로 좋고 나쁜 상황과 환경을 넘어 우리로 하여금 평소에 붙잡고 있던 정답을 경험적으로 확신하도록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한다. 이때 우리는 번민과 갈등에 사로잡혀 괴로움의 한가운데 서게 될 때가 있다. 마치 제럴드 싯처의 삶에 찾아온 상실의 순간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선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갑작스럽게 다가온 삶의 깊은 상실감 앞에서 이론적 확신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을 향한 바르고 건강한 선택을 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정답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그 정답으로부터 먼 선택을 하도록 만들거나, 처한 상황이 애써 그 정답을 외면하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비록 잘못된 선택을 한다 할지라도 그 선택에 대한 변명과 명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남편을 비롯한 집안의 세 남자가 죽은 삶에 찾아온 깊은 상실감을 맞이하며 선택의 갈림길에 선 한 여인을 소개한다. 룻의 이야기다. 삶에 찾아온 위기 속에서 그녀는 시어머니를 따르기로 선택한다. 자신 민족과 신앙을 향하여 돌아가는 길이 아닌, 왕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을 선택한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며 스스로 왕이 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이스라엘의 영적으로 척박한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보다 더 깊은 상실감에 젖어 있는 노모와 함께하는 여정을 기꺼이 선택하며 이방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왕 되심을 삶으로 고백하며 어떠한 어려움과 역경이 다가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절대 굴복하지 않고 베들레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룻에게는 시어머니를 따르지 않아도 내세울 수 있는 나름대로 변명과 명분이 있었지만, 인생의 깊은 상실감 앞에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란 고백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먼 미래를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이렇게 선택하면 무엇인가 보상이 따르겠지?”라는 생각조차도 그녀의 상황 속에서는 사치였을 정도로 상실의 한복판에 있었지만, 있는 그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붙잡고 그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계획은 그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깊은 상실의 자리에서 모든 갈등과 고통을 극복하며 정답을 선택한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는 당신을 왕으로 고백하는 연약한 여인을 왕의 가문으로 세우는 불후의 명작 완성하는 것으로 움직였다.
수 없이 반복해야 하는 선택의 연속 가운데서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답에 일치하는 선택을 하고 있는가? 선택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 옳은 것, 기뻐하시는 것, 선하신 것인가? 라는 부분이다. 선택은 언제나 상황을 근거로 해서는 안 된다. 선택은 진리를 붙잡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삶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감정적 거리와 우리가 붙잡아야 할 진리와의 거리를 끊임없이 좁혀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에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것의 일치(엡 4:13)와, 더 나아가서 알고 있는 정답과 우리의 선택이 일치되는 하나님 자녀다움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World Teach. 사람을 세우는 사람 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8-22. QT큐티체조.

간단설명.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섭리 때문일 뿐 육체의 변덕을 따른 것이 아님을 밝히고,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처럼 순종해야 함을 강조한다.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1:12-24
한글본문.
12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13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15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17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8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23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영어본문.
12 Now this is our boast: Our conscience testifies that we have conducted ourselves in the world, and especially in our relations with you, in the holiness and sincerity that are from God. We have done so not according to worldly wisdom but according to God’s grace. 13 For we do not write you anything you cannot read or understand. And I hope that, 14 as you have understood us in part, you will come to understand fully that you can boast of us just as we will boast of you in the day of the Lord Jesus. 15 Because I was confident of this, I planned to visit you first so that you might benefit twice. 16 I planned to visit you on my way to Macedonia and to come back to you from Macedonia, and then to have you send me on my way to Judea. 17 When I planned this, did I do it lightly? Or do I make my plans in a worldly manner so that in the same breath I say, “Yes, yes” and “No, no”? 18 But as surely as God is faithful, our message to you is not “Yes” and “No.” 19 For the Son of God, Jesus Christ, who was preached among you by me and Silas and Timothy, was not “Yes” and “No,” but in him it has always been “Yes.” 20 For no matter how many promises God has made, they are “Yes” in Christ. And so through him the “Amen” is spoken by us to the glory of God. 21 Now it is God who makes both us and you stand firm in Christ. He anointed us, 22 set his seal of ownership on us, and put his Spirit in our hearts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23 I call God as my witness that it was in order to spare you that I did not return to Corinth. 24 Not that we lord it over your faith, but we work with you for your joy, because it is by faith you stand firm.

도움말.
보증(22절). 원어 ‘알라본’으로서 무언가를 구입할 때 정당한 거래가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는 의미로 주는 계약금을 가리킨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시리라는 보증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무엇인가(22절)?
⬇ 아래로 인간. 바울은 주 예수의 날에 무엇이 자랑이 된다고 말하는가(14절)?
? 물어봐.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이겠는가(20절)?
! 느껴봐. 하나님의 약속은 성령을 보증으로 삼으신 만큼 확실하고 놀라운 것임을 믿는가?
➡ 옆으로 실천해. 내가 오늘 ‘아멘’으로 붙들어야 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그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며 더욱 힘쓸 일은 어떤 것인가?

Meditation. 오직 하나님 앞에 “아멘”
바울은 고린도 교회 방문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2장에서 구체적으로 해명한다. 자신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문제가 여전히 잔존하는 상황에서 준비 없이 재회하는 것은 더 심각한 관계적 문제를 만들 수 있음을 고려해서, 변덕쟁이라는 비난을 스스로 감수하더라도 고린도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2:1-4). 그러나 이 해명 이전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부각시키는 메시지를 열어간다. 사람이 그 약속을 지켜 스스로 신실함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공고히 세워지는 것이다(18절). 사람의 계획 앞에 “예”라고 긍정하고 그것을 준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앞에서 언제나 “아멘”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서게 된다(잠 19:12).
아멘은 우리의 입술과 몸을 통해 고백하고 나타내야 한다. 당신은 진정한 아멘의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오늘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앞에서 아멘으로 반응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8-21. QT큐티체조. 고린도 후서 시작합니다.

간단설명.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환난 중에 성도를 위로하시는 분임을 밝히고, 그 가운데서 받는 위로로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신다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으로 실증한다.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1:1-11
한글본문.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영어본문.
1 Paul,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the will of God, and Timothy our brother, To the church of God in Corinth, together with all the saints throughout Achaia: 2 Grace and peace to you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3 Praise be to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the Father of compassion and the God of all comfort, 4 who comforts us in all our troubles, so that we can comfort those in any trouble with the comfort we ourselves have received from God. 5 For just as the sufferings of Christ flow over into our lives, so also through Christ our comfort overflows. 6 If we are distressed, it is for your comfort and salvation; if we are comforted, it is for your comfort, which produces in you patient endurance of the same sufferings we suffer. 7 And our hope for you is firm, because we know that just as you share in our sufferings, so also you share in our comfort. 8 We do not want you to be uninformed, brothers, about the hardships we suffered in the province of Asia. We were under great pressure, far beyond our ability to endure, so that we despaired even of life. 9 Indeed, in our hearts we felt the sentence of death. But this happened that we might not rely on ourselves but on God, who raises the dead. 10 He has delivered us from such a deadly peril, and he will deliver us. On him we have set our hope that he will continue to deliver us, 11 as you help us by your prayers. Then many will give thanks on our behalf for the gracious favor granted us in answer to the prayers of many.

도움말.
위로(3절 등). 본 단락에서 열 번 쓰였으며, 위안이라기보다 격려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고난 중에 인내하는(7절) 과정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시사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3-4절)?
⬇ 아래로 인간.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을 겪을 때 동일하게 그리스도로 인해 얻는 것은 무엇인가(5절)?
? 물어봐. 성도의 기도는 어떤 힘이 있는가(11절)?
! 느껴봐. 나는 주님을 위한 고난에는 마침내 그리스도의 위로가 있다는 견고한 소망을 붙들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내가 불평하지 않고 소망을 품고 견뎌내야 할 고난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Meditation.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
바울은 고난의 미학을 외친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위로를 불러 오고, 그 위로는 밖으로 넘쳐 유사한 고난을 받는 사람을 능히 위로할 수 있게 한다(4절).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가 되게 한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고난은 다른 사람을 위한 대속성(代贖性)을 가진다(6절). 바울도 에베소 등지에서 정신적, 신체적 한계를 넘는 고난을 당했고 이로 인해 죽음까지 생각했다(8절).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처지였다. 그러나 그 고난들로 인해 오히려 자기를 의지하려는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겸손의 덕을 터득한다(9절). 그리고 자신의 증언과 삶의 본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고난보다 크고 풍족한 하나님의 위로의 크기를 확증하며 그 위로를 흘려보낸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은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위로로 마무리된다. 고난의 잔에 부은 하나님의 위로가 넘쳐흘러 옆으로 파급되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고난은 마이너스의 섭리가 아니라 플러스의 섭리다. 당신은 이러한 고난의 미학을 잘 누리고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뜻’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는 신자, 비신자 할 것 없이 모두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 민족이 당한 고통의 역사도, 일제식민통치나 6·25전쟁 등에서의 처참한 살인과 폭력과 억압도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신학은 수학처럼 상황과 관계없는 불변하는 해답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는 실로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활동하시는 분이심을, 그분이 우리의 삶에 깊이 관여하시는 분이심을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20세기의 지옥인 처참한 아우슈비츠의 역사도, 부조리한 우리 삶의 역사도 아무런 반항도 없이 그대로 묵인하고 감내해야 한다는 말일까? 이렇게 참혹한 악의 역사가 예정된 것이라면 과연 이런 하나님을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20세기에 이르러 신학은 모든 세상사가 결정론적으로 예정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세상사를 결정론적인 인과율의 그물 안에 묶어두는 그런 신은 더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찬양하기도 어렵다.

그 뿐만 아니라 결정론적으로 이해된 예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조차 파괴해 버린다. 더구나 하나님이 영원 전에 세상사를 예정해 두셨다면,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역사할 필요도 없으며 또한 우리도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원 전에 세상사가 다 결정되어져 있다면 이제 하나님은 하실 일이 없지 않은가. 그분은 영원 전에 프로그램화된 세상사가 그대로 일어남을 그저 관망하기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사를 관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한다. 더구나 오늘날의 신학은 하나님은 억압자가 아니라 억압당하는 자의 편이시며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자의 편이심을 고백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희생당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지금도 이 뒤틀린 역사를, 지옥으로 치닫는 역사를 해방의 역사, 화해의 역사, 생명의 역사로 돌려 놓으신다.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도대체 절망과 좌절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희망할 수 있겠는가.

오래전부터 신학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분의 창조세계 돌보심을 표현하는 용어로 ‘섭리’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리고 ‘섭리’를 하나님의 창조로 이해했다. 17세기의 개신교 정통주의 교의학에 따르면 창조는 태초의 창조, 계속되는 창조, 마지막 창조로 구분된다. 섭리는 계속되는 창조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보존하시며 이끄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우리는 동참한다. 이를 협동(concursus)이라 표현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섭리는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외치는 피조물의 기도와 실천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결정론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예정이나 예지하심이라는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피조세계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뜻하는 섭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의 ‘뜻’도 결정론적이거나 숙명론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새로움의 사건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창조적 의지와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징은 생명의 충만과 해방을 뜻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창조명령의 성취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창조된 피조물이 그분을 닮아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살리며, 충만한 생명 안에서 살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피조세계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반목하고 서로를 지배하고 억압하며 반생명적인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한 현실이 우리 민족에겐 일제식민통치와 6·25전쟁으로 숱한 역사의 질곡으로 경험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이러한 지옥의 현실 가운데서도 신앙은 굴하지 않고 일어나 하나님의 뜻, 그분의 섭리, 그분의 새로운 창조와 구원을 붙잡고자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과거적 원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붙잡아야 할 미래이며 성취되어야 할 약속이다. 섭리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뜻 없이 무릎 꿇거나 운명에 맡겨 살지 않는다. 도리어 생명과 창조의 역사를 향해 일어서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기도한다.

<한국성결신문, 기독시론에서 가져왔습니다. 박영식 교수는 서울신대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다 예정된 것이라고요?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장로교의 영향이 막강하다. 장로교의 영향 때문인지 많은 교회에서 예정이란 말을 서슴없이 사용하곤 한다. 신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민감한 부분인데도 말이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예정해 놓으셨다면, 도대체 인간에게 자유란 있는 것일까?

도스토옙스키나 알베르 카뮈, 그리고 사르트르 같은 이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외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을 규정하는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에게 자유란 없다.’ 즉 신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신학사에는 예지라는 단어도 등장하고 예정이라는 단어도 등장한다. 엄밀하게 분석하면 두 개념은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바꿔 사용해도 무관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예측은 빗나갈 수 있지만 하나님이 예지하신 일은 예정대로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지는 곧 예정이다.

하나님의 전능을 고백함으로써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위대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자유의지론’이라는 책을 통해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파열을 잠재우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할지 이미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예지한 사건은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예지된 그 사건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일어난다. 하나님은 예지하고, 예지된 사건은 필연적으로 일어나지만, 그 사건의 원인은 자유의지에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예를 들어보자. 고수와 하수가 바둑을 둔다. 고수가 계획적으로 한 수를 둔다. 하지만 하수는 그 계획을 알 리가 없다. 고수는 자신이 이렇게 두면 하수가 저렇게 둘 것을 알고 있다. 예상대로, 틀림없이 하수는 그렇게 둔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보다 훨씬 수가 높으신 분이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할지 즉, 우리의 자유의지가 무엇을 선택할지 미리 알고 계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예지하신 바대로 그렇게 한다. 그에 따르면 예지하시는 하나님은 강제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지 미리 알고 계셨을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예정과 자유의지의 양립 가능성을 주장함으로써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두기보다는 자유의지를 행사한 인간에게 두고자 했던 것이다. 예정과 자유의지 사이의 논쟁은 중세신학을 넘어 종교개혁자들에게 이어진다.

하지만 루터는 예지와 자유의지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중세신학의 골치 아픈 논의에 철퇴를 가하며 그의 ‘노예의지론’에서 죽음과 저주, 재앙도 모두 하나님에 의해 일어난다고 못 박았다. 칼뱅도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면서 살인자나 행악자, 범죄자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라고 주장했다.

자유의지보다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주권을 강조하고자 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이렇게 모든 일에 예정을 앞세울 경우 하나님은 선한 분이 아니라 악한 존재로 생각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던 사람이 라이프니츠였다.

그는 하나님은 절대 선하신 분이라고 전제한다. 선하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에 앞으로 창조될 수 있는 세상들을 요즘 말로 하면 시뮬레이션을 해 본 후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다. 따라서 바로 지금 이 세상은 가장 좋은 세상이다.

그렇다면 설령 이 세상에서 이해 불가능한 악을 경험한다고 해도 이 악은 가장 좋은 세상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가 죽고 난 후, 1755년 11월 1일 리스본에 진도 9의 대지진이 일어나 리스본 시민의 3분의1 가량이 죽고 85%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예정을 앞세운 기계적인 낙관론은 현실적으로 치명상을 입는다. 볼테르는 라이프니츠의 낙관론을 빗대어 ‘캉디드’라는 풍자소설을 발표해 예정론을 비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칼뱅이 예정론을 처음 강조했을 때 그는 예정과 선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쫓겨난 신자들을 위로하고자 했다. 가톨릭교회는 너희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너희를 선택하셨다고 설교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 천편일률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딱지를 무책임하게 붙인다면 귀중한 신앙적 고백은 또다시 비웃음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성결신문, 기독시론에서 가져왔습니다. 박영식 교수는 서울신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왜 형통하는가?

종종 사극드라마를 보면, 갖은 수단을 동원해 권좌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기 배만 채우는 자가 등장한다. 온갖 모략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한평생 편안한 삶을 살아가다가 말년에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뒤집힐 때 옥살이를 하게 된다. 소위 권선징악으로 드라마는 끝이 난다.

‘그래, 착하게 살아야지’라는 도덕적 감정과 ‘조금 나쁜 짓을 해서라도 저런 부귀영화를 누려봤으면 좋겠다’라는 현실적 소원이 충돌한다. 여기에 이생의 삶이 전부라는 세속주의까지 가세하면현실론으로 생각은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드라마 속 악인의 입에서도 이런 대사가 튀어나온다. ‘극락왕생은 무슨? 나는 이 땅에서 이미 극락 중의 극락을 맛보았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도 보고 듣고 부딪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왜 의롭게 사는 사람보다 악한 자들이 더 떵떵거리면서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인지? 구약성서의 한 지혜자는 이렇게 권면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어쩌면 이제 막 직장생활에 뛰어든 현실감 없는 자식의 미래를 염려하는 부모의 말씀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왠지 몸을 사리면서 정의로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말고 얼버무리면서 살라는 다소 비겁한 말로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왜 악인이 형통하는 것일까?

사실 이 질문은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악인이 형통하는 사회를 용인하고 있는가? 우리는 왜 정의롭고 선하게 살라고 하면서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는가? 왜 우리는 선으로 악에 맞서 싸우지 않는가?

이제 신학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왜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을 내버려두시는가? 이 질문에 대해 고전적으로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리라 본다.

첫째,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을 그저 관망하지 않으신다는 대답이다. 하나님은 악인을 역사로 심판하신다. 비록 악인들이 흥왕한 듯 보이지만, 역사는 악인들을 심판하고 불의와 부정을 넘어 자유를 향해 나아간다. 물론 막연한 발전사관은 인본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한 낙관을 잉태하지만, 신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가 역사 안으로 돌입하여 들어옴을 부정하지 않는다.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한없이 성장해 나가는 상향적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이 세상 안으로 돌입해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악인을 심판하며 인류의 역사를 정화하며 승화시킨다.

둘째, 기독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신앙함으로써, 역사 내의 심판이 성취하지 못한 것의 완전한 실현을 희망한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선취(先取)되었고, 의인들의 구원과 악인들의 심판이라는 우주적 사건에 대한 희망을 뜻한다.

인류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구현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당신의 역사로 온전히 성취하신다. 이러한 종말론적 신앙은 역사초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결코 역사를 등지는 탈속적인 성격과는 무관하다.

악인의 형통을 목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해서도 안 되지만(잠 24:1,19, 시 73), 정의롭고 선한 길을 무의미하게 여겨 포기해서도 안 된다(시1:1, 37 :27). 오히려 악인의 형통함은 우리시대와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 사이의 불일치와 갈등으로 이해해야 한다.

곧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따라서 악인의 형통함 앞에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기도하고 실천해야 한다. ‘주의 나라 오시옵소서.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왜 악인을 내버려두시는가?

성서는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신다고 하면서도, 또한 악인에게도 자비를 베푸신다(마 5:45)고 말한다. 어쩌면 하나님은 무한한 긍휼을 통해 악인을 부끄럽게 함으로써 그를 심판하며 또한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악인의 진정한 악함은 그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함에 있을 것이다(습 3:5).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함을 그저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악인에게도 무한한 긍휼과 자비를 베푸심으로 오히려 그를 부끄럽게 하신다.

<한국성결신문, 기독시론에서 가져왔습니다. 박영식 교수는 서울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