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분명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선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피조세계는 본질적으로 그분을 닮아 선해야 할 텐데, 왜 우리는 악을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 도대체 악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인가? 왜 악이 존재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다분히 추상적이고 사변적이지만 우리의 실제 생활과 전혀 무관한 질문은 아니다.

시편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이런 질문이 탄식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편 10편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편 13:1)

비단 성서뿐이겠는가. 지난 수난주간에 모든 사람을 침울하게 하며 안타깝게 했던 세월호 참사를 목도하면서 나는 한없는 무기력과 부끄러움, 또 한편으로는 분노,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왠지 모를 죄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단 나뿐이 아니었다. 학생들도 무기력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듯보였다. 교내 채플 기도시간마다 흐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고, 흐르는 눈물을 남몰래 닦아내야만 했다.

결국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얼 하고 계셨는가? 선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일반 사람들은 비아냥거리면서 이런 투의 질문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가슴을 치며 이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왜 바라만 보고 계셨습니까?’

신학사에선 오래전부터 이런 질문에 나름대로 다양한 답변을 제시해 왔다. 후에 이런 답변을 신정론(神正論)이라 명명했는데, 여기서 몇 가지만 간추리면 이렇다.

첫째는 미학적 신정론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시는 아름다운 세상에는 어둠이 필요하다. 마치 아름다운 회화에도 어두운 색깔이 사용되듯이, 아름다운 음악에도 불협화음이 사용되듯이, 그렇게 이 세상에 나타나는 악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다. 미학적 신정론에 따르면 지옥조차 아름답다.

둘째는 교육적 신정론이다. 하나님은 환난을 통해 우리를 더욱 성숙하게 만드신다. 어릴 적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듯이 하나님은 불 같은 시험으로 우리를 정금같이 단련하신다. 여기서 고난은 축복의 통로이다.

셋째는 역사-종말론적 신정론이다. 지금 일어나는 악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께서 역사의 심판을 통해, 그리고 더 나아가 최후의 심판을 통해 극복하고 제거하실 것이다. 역사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마치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역사는 과거보다는 현재가, 현재보다는 미래가 더욱 아름답고, 결국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통해 억울한 악의 희생자들은 위로를 받고 지복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위로와 희망의 중심축이 될 것이다.

이름은 낯설더라도 익히 설교를 통해 많은 들었던 내용이리라. 신정론의 여러 가지 답변들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변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악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은 인간(고난당하는 자)의 질문 앞에 서게 되고 그 질문 앞에서 이제 인간(신학자)이 하나님을 변호하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어쨌든 전통적인 신정론의 답변은 고난에는 ‘나름 이유’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고난당하는 당사자 자신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인용한 시편을 묵상해 보자. 시편의 질문은 철저히 고난당하는 당사자의 절규를 드러내고 있다. 신앙의 질문일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과격하고 숨김이 없다.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도 이렇게 부르짖지 않았던가.

우리는 고난과 악에 대해 재빨리 하나님을 변호하고 신앙의 답변을 주려 하지만, 성서는 오히려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십자가에서 부르짖는 아들 예수의 아픔 안에 함께 아파하시며, 죽어가는 아들 안에서 더 철저히 죽음을 감내하신 아버지 하나님, 그분만이 고통당하는 자를 진정 위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신다. 그분도 아파하며 죽음을 경험하신다. 그리고 절규하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타인의 고통에 무덤덤한 자들의 세상을 심판하시며 고통당하는 자들의 영원한 버팀목이 되어 주신다.

<한국성결신문, 기독시론에서 가져왔습니다. 박영식 교수는 서울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는가?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고백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병든 자를 치유하신다. 성서의 보도에 따르면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없다.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전능성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Nothing is impossible(불가능은 없다).’ TV 광고의 문구다. 기독교 신학이 하나님의 전능성을 말해 왔다면 우리 시대는 인간의 전능성을 주장한다. 기술과 과학을 앞세워 우리 시대는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할 뿐 아니라 불가능이라는 말 자체를 부끄럽게 여긴다.

전능한 과학이 환경문제를 비롯한 미래의 염려를 깨끗이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다. 의사도 마찬가지다. 중환자의 수술을 앞두고 ‘이것은 무모한 수술입니다. 불가능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남긴다.

비단 의사뿐인가. 피로사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개개인도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극도의 과장 속에서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드는 데 익숙하지 않은가.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전능성과 인간의 전능성은 어쩌면 서로를 닮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 캐릭터,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등은 신적 전능성과 인간의 전능성 사이의 심리적 교환이 상품화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속에서 현대인은 자신의 현실적 무능함을 파괴하고 쟁취하지 못한 신적 전능성을 만끽한다. 그뿐이 아니다. 신앙의 현장에서도 전능성에 대한 인간의 애착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포장된다. 힘을 숭상하는 인간의 욕망은 ‘믿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전능의 딱지가 달라붙어 상한가를 차지한다.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전능으로 포장할 때, 전능은 ‘만능’으로 둔갑한다. 하나님의 전능은 도깨비방망이가 되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니, 도깨비방망이를 손에 들고 소원을 비는 인간 자신을 위해 뭐든지 해야 하는, 반드시 해내야 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이 말해 왔던 하나님의 전능은 이런 의미의 만능이 아니다.

전능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고전적인 의미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것을 뭐든지 하실 수 있다.’ 이 고전적인 전능의 정의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하여 중세신학자들에게서 세밀하게 분석되고 논의된다.

하나님은 현실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하실 수 있는가? 즉, 하나님은 1+1의 답을 3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나님은 네모 난 삼각형을 만드실 수 있는가? 또한 ‘돌의 역설’이라 불리는 대로 하나님은 자신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돌을 만드실 수 있는가?

만드실 수 없다면 무능한 것이요. 만드실 수 있다 해도 들 수 없으니 무능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뭐든지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악을 행할 수도 있는가? 하나님은 거짓말도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병에 걸릴 수도 있는가?

설령 하나님이 뭐든지 다 하실 수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무엇이든지 다 하시는 분은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하시는 분이시다. 이 말을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에 부합하는 일을 하신다고 정리해 보자.

그렇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이나 악한 일을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뭐든지 마음대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인 사랑에 부합하는 일을 하신다.

즉, 기독교 신앙이 고백하는 전능은 뭐든지 다 한다는 식의 만능도 아니고, 자기 맘대로 한다는 식의 자의도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현실을 비현실로 만드시거나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무지막지한 힘만을 과시하려는 그런 괴물이 아니다.

현대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하나님의 전능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아버지 되심의 사랑을 배제한 전능은 세속적인 독재자의 무자비한 힘에 불가하다.

더 나아가 오늘날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전능의 본질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의 고난에 동참하신 낮아지심과 비움의 사랑에서 찾는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의 전능은 자신의 힘을 과시함이 아니라 오히려 약함에서 계시된다(고후 12:9).

그리스도 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약해질 수 있는 자기 비움의 힘을 보이셨다(빌 2:7). 그리스도인도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자랑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후 11:30, 12:10).
<한국성결신문 기독시론 에서 가져왔습니다. 박영식 교수는 서울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

우리의 몸이 이상 징후를 발견하는 것은 복이다. 그것 때문에 검진하고,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며 처방에 따라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몸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경건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그럴싸하게 갖추어져 있는 경건의 모양에 익숙해져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며 영적 무력증에 빠지는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고 경건의 능력을 상실해 갈 때는 과연 어떤 증세를 수반하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이 없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사야 29:13)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 설령 그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려 한다. 하나님의 마음보다는 내 마음의 원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고, 때로는 나의 원함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지기만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다. 스스로 생각할 때 니느웨는 멸망 받아 마땅한 도시인데 그곳으로 가서 메시지를 전하라던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 채 다시스로 달아났던 요나와 같은 모습이다. 자신이 원하는 곳도, 자신이 원하던 방식도 아니기에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무심한 선지자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다.

진리가 아닌 감정이나 상황을 쫓는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이 느끼는 안전지대에 일치되는 상황이 전개될 때 그것을 무조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붙잡고 있는 진리가 맞기 때문에 그것을 향해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러므로 그 상황을 좇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상황은 늘 변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붙잡는 자는 삶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 속에 더욱 견고해지고 진리에 일치되는 삶에 가까워지지만, 상황을 좇는 사람은 삶에 늘 요동함이 있다. 상황에 따라 늘 흔들리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으로 인해 요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가?

공동체가 아닌 나만의 유익을 구한다(?)
목회의 현장에 있는 적지 않은 지도자들이 “요즈음 성도들이 너무 바빠서요 모이기가 너무 힘들어요! 잘 모이지 않아요!” 등과 같은 아우성을 쏟아 놓는다. 개인이 처한 눈앞에 필요에 무게중심이 이동하기에 공동체를 향한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 세속화의 물결이 거세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을 띠기 시작한다. 때로는 세상의 그러한 흐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하며 변명의 기회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공동체적 삶을 가르친다.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면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5)고 말한다. 교회 공동체의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는 신앙의 선배들이 남긴 공동체를 향한 희생과 섬김이었다. 지도자들은 양들이 모여있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놓았다. 양들은 그러한 지도자들 신뢰하며 자신들의 젖과 털을 아낌없이 내어 놓았다. 모두가 공동체를 위해 시선을 고정했다. 공동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 속에서 지도자들은 공동체를 통해 사사로운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성도들은 편의점 드나들듯이 신앙 생활하는 부작용이 심상치 않다.

은혜를 구하는 간절함도 없고 감사도 사라진다(?)
긴 옷이 생겼다. 시장을 나가보면 사람들이 문안한다. 어디를 가도 이제는 나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어느덧 많은 것을 누리게 된 사람들에게 내부변이를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망가뜨리는 암과 같이 생겨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간절함’의 상실이다. 물이 없어 황폐할 때는 주님을 향한 갈망이 극대화되지만, 갈증이 해소되고 어는 정도 필요한 물을 비축하게 되면 황폐할 때 품었던 간절함이 사라지는 현상이 우리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삶이 풍요로워져서 은혜를 갈구함과 같은 앙모함이 없는 것보다 물이 없어 황폐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갈망과 간절함이 큰 것이 우리에게 복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하여 간직된 ‘간절함’의 정도를 측정해 보라!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마 5:7) 긍휼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누리는 복 가운데 하나이자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긍휼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역으로 내가 누군가를 향하여 긍휼을 흘려보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선한 물을 받아들이고, 그 물을 적당히 흘려보내는 자연스러운 순환이 있을 때 호수의 건강함이 유지된다. 받아들이기만 하면 물이 범람하여 오히려 주위를 망가뜨린다. 흘려보내기만 하면 바닥이 노출되고 마른 땅으로 황폐케 된다.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를 은혜의 바다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케 하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고 계시지 않는다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강도들로 인해 삶에 절박함에 노출된 약한 이들을 향한 긍휼을 흘려보낼 수 없다. 나만 풍성해져 주변을 황폐케 하던가, 줄 것이 없는 메마른 심령이 되든가 할 테니까 말이다.

<World Teach. 사람을 세우는 사람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8-20. QT큐티체조.

간단설명.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강건할 것과 주님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하고 그들을 알아 줄 것을 권면하고, 동역자들의 문안을 전하면서 편지를 맺는다.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6:13-24
한글본문.
13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14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5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17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8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19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영어본문.
13 Be on your guard; stand firm in the faith; be men of courage; be strong. 14 Do everything in love. 15 You know that the household of Stephanas were the first converts in Achaia, and they have devoted themselves to the service of the saints. I urge you, brothers, 16 to submit to such as these and to everyone who joins in the work, and labors at it. 17 I was glad when Ste-phanas, Fortunatus and Achaicus arrived, because they have supplied what was lacking from you. 18 For they refreshed my spirit and yours also. Such men deserve recognition. 19 The churches in the province of Asia send you greetings. Aquila and Priscilla greet you warmly in the Lord, and so does the church that meets at their house. 20 All the brothers here send you greetings. Greet one another with a holy kiss. 21 I, Paul, write this greeting in my own hand. 22 If anyone does not love the Lord–a curse be on him. Come, O Lord! 23 The grace of the Lord Jesus be with you. 24 My love to all of you in Christ Jesus. Amen.

도움말.
깨어(13절). 헬라어 ‘그레고레오’의 현재형으로, 일시적인 각성이 아니라 깨어 있는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라는 의미다.
사랑으로(14절). 헬라어 ‘엔 아가페’로서 ‘사랑 안에서’라는 뜻이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성도의 필요를 어떻게 채우시는가(15-18절)?
⬇ 아래로 인간. 성도가 모든 일을 행할 때 붙들어야 할 대원칙은 무엇인가(14절)?
? 물어봐.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의 집이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19절)?
! 느껴봐.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내게 공급해 준 사람들을 잘 기억하고 감사하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하나님의 은혜를 전해 준 사람들 중에서 오늘 내가 문안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어떻게 문안하겠는가?

Meditation. 은혜와 사랑으로 채워진 편지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일단락하면서 성도들을 한 데 불러 모은다. 먼저 네 가지 충심어린 권면을 준다. 깨어 있어 영적 원수와 대적들을 경계할 것과, 믿음에 굳게 서서 복음 위에서 요동하지 말아야 할 것과, 남자답게 강건하여 맞서 싸울 것과, 사랑으로 행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며 성장시킬 것을 명한다(13-14절). 또한 성도들이 사역자들에게 순종할 것과 그들의 수고를 알아줄 것을 당부한다(16-18절). 그들은 복의 통로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바울은 여러모로 자신에게 실망과 상처와 서운함을 안겨 준 교회이지만 마지막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신의 사랑을 친필에 담아 마무리한다(21-24절). 결국 다시 오실 주님 앞에 한 덩어리 되어 함께 서게 될 날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22절).
마라나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이 믿음의 비전과 고백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신은 지금 거룩한 동역자들에게 돌려야 할 몫을 잘 나누고 있는가? 실망과 상처를 준 사람들과도 천성에서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을 진정으로 믿고 사랑하며 동역하고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8-19. QT체조.

간단설명. 바울은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따로 구별해 놓기를 권면한다. 또한 고린도를 방문하고자 하는 그의 계획을 밝힌다.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6:1-12
한글본문.
1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5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6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8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9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10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11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영어본문.
1 Now about the collection for God’s people: Do what I told the Galatian churches to do. 2 On the first day of every week, each one of you should set aside a sum of money in keeping with his income, saving it up, so that when I come no collections will have to be made. 3 Then, when I arrive, I will give letters of introduction to the men you approve and send them with your gift to Jerusalem. 4 If it seems advisable for me to go also, they will accompany me. 5 After I go through Macedonia, I will come to you–for I will be going through Macedonia. 6 Perhaps I will stay with you awhile, or even spend the winter, so that you can help me on my journey, wherever I go. 7 I do not want to see you now and make only a passing visit; I hope to spend some time with you, if the Lord permits. 8 But I will stay on at Ephesus until Pentecost, 9 because a great door for effective work has opened to me, and there are many who oppose me. 10 If Timothy comes, see to it that he has nothing to fear while he is with you, for he is carrying on the work of the Lord, just as I am. 11 No one, then, should refuse to accept him. Send him on his way in peace so that he may return to me. I am expecting him along with the brothers. 12 Now about our brother Apollos: I strongly urged him to go to you with the brothers. He was quite unwilling to go now, but he will go when he has the opportunity.

도움말.
연보(1절). 원어로 ‘로게이아’로서 정기적으로 드리는 헌금을 뜻한다. 이 의미로는 신약 전체에서 본 절과 2절에만 쓰였다.
매주 첫날에(2절). 원문에는 ‘매 안식 후 첫 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안식 후 첫 날에 정기적 모임을 가졌다(행 20:7).
예루살렘(3절). 예루살렘 교회는 당시 재정적으로 궁핍한 성도들이 많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팔레스타인 지방의 흉년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갈 2:10, 행 24:17).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바울의 여정에 어떻게 관여하고 계시는가(7절)?
⬇ 아래로 인간. 바울이 에베소에 계속 머물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8-9절)?
? 물어봐. 성도를 위한 연보는 어떠한 의미인가(1, 3절)?
! 느껴봐. 인생 순례길에서 머물고 떠나는 일에 나는 주님의 허락을 구하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오늘 주님의 허락을 구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가?

Meditation.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문
바울은 오직 한 가지를 염려했다. 바로 주님의 몸 된 교회였다(고후 11:28). 특히 그의 염려는 개교회만 아니라, 열방 구석구석에 산재한 범우주적 교회를 포괄했다. 바울은 봉헌된 물질을 교회 간에 소통시키고, 디모데나 아볼로와 같은 사역자들을 친히 천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유통하는 사명을 감당했다(3절). 또한 그의 가고 서는 일체의 일을 ‘주님의 허락’에 맡긴다(7절). 사실 그는 고린도로 가기를 원했지만 에베소에 계속 머물 계획을 밝히는데, 이는 비록 그 곳에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도 하나님이 광대하고 유효하게 복음의 문을 열고 계셨기 때문이었다(8-9절). ‘자신을 환영하는가 혹은 배척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복음의 문이 열려 있는가’의 여부가 그의 걸음을 정하는 이정표였다.
하나님은 문을 닫기도 하시고 열기도 하신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이 닫으신 문을 여전히 두드리고 있느라 열고 계신 문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그 문을 지나서 복음의 메시지를 증언하기 위해 오늘 당신이 준비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8-18. QT큐티체조.

간단설명. 바울은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홀연히 변화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을 약속하면서 이 소망을 붙잡고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쓸 것을 당부한다.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5:50-58
한글본문.
50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영어본문.
50 I declare to you, brothers, that flesh and blood can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nor does the perishable inherit the imperishable. 51 Listen, I tell you a mystery: We will not all sleep, but we will all be changed– 52 in a flash, in the twinkling of an eye, at the last trumpet. For the trumpet will sound, the dead will be raised imperishable, and we will be changed. 53 For the perishable must clothe itself with the imperishable, and the mortal with immortality. 54 When the perishable has been clothed with the imperishable, and the mortal with immortality, then the saying that is written will come true: “Death has been swallowed up in victory.” 55 “Where, O death, is your victory? Where, O death, is your sting?” 56 The sting of death is sin, and the power of sin is the law. 57 But thanks be to God! He gives us the victory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58 Therefore, my dear brothers, stand firm. Let nothing move you. Always give yourselves fully to the work of the Lord, because you know that your labor in the Lord is not in vain.

도움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54절). 이사야 25:8과 호세아 13:14을 인용하고 있다. 사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사망이 더 이상 이기지도, 쏘지도 못하는 날이 오리라는 약속들이 담겨 있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57절)?
⬇ 아래로 인간.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들에게 합당한 삶의 태도는 무엇인가(58절)?
? 물어봐. 재림의 나팔 소리가 울릴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되는가(51-52절)?
! 느껴봐. 나는 주님의 재림의 날에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유업으로 받게 되리라고 확신하는가(50절)?
➡ 옆으로 실천해. 장차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사람의 신분에 맞게 고쳐야 할 점은 무엇인가?

Meditation. 영원한 승리자의 개선가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날이 도래하고 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온 천지에 울리게 될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썩지 않을 것으로 홀연히 변화할 것이다(52-53절). 그 때에는 이제껏 율법을 등에 업고 죽음의 권세를 휘두르던 사망에게 최종적 사망이 선고되고 집행될 것이다(54절). 완전한 역전승을 거두게 될 것이다(57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게 될 것이다. 이 노래를 준비하며 견실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붙들고 있는 부활 소망의 요지이며 결론이다.
사망의 권세에 압도되지 말라. 주눅 들지 말라. 바울과 같이 담대히 호령하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당신은 자격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사망이 당신 앞에 현실이 되어 다가오는 그 때, 부활은 사망보다 더욱 더 선명한 현실이 될 것이다. 당신은 두려움이 없는 소망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