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03.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다. 세상의 지혜로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로 사람을 구원하신다. 그리고 구원받는 사람들에게 그 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18-25
한글본문.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영어본문.
18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19 For it is written: “I will destroy the wisdom of the wise; the intelligence of the intelligent I will frustrate.” 20 Where is the wise man? Where is the scholar? Where is the philosopher of this age? Has not God made foolish the wisdom of the world? 21 For since in the wisdom of God the world through its wisdom did not know him, God was pleased through the foolishness of what was preached to save those who believe. 22 Jews demand miraculous signs and Greeks look for wisdom, 23 but we preach Christ crucified: a stumbling block to Jews and foolishness to Gentiles, 24 but to those whom God has called, both Jews and Greeks, Christ the power of God and the wisdom of God. 25 For the foolishness of God is wiser than man’s wisdom, and the weakness of God is stronger than man’s strength.

도움말.
전도(21절). 헬라어 ‘케리그마’로서, 복음의 내용과 그 전달 방식 모두를 포괄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24절)?
⬇ 아래로 인간. 구원을 받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가(18절)?
? 물어봐.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신 방법은 무엇인가(21절)?
! 느껴봐. 나는 일상 속에서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십자가의 도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더욱 풍성히 체험하기 위해 삶 가운데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Meditation. 뒤집어진 가치와 십자가의 도
세상의 가치체계가 전복되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지혜와 미련한 것의 가치를 뒤집으셨다(20절). 전복된 가치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으로 치부되었다(18절). 게다가 유대인들은 십자가 대신에 표적 곧 기이한 현상을, 헬라인들은 지혜 곧 이성적 증거를 가져 오라고 요구했다. 왜곡된 세상의 가치체계 속에 십자가의 복음이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 그대로 연착륙할 수 없었다.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를 가져오기 위해 선택된 것은 ‘전도’라는 미련하게 보이는 방식이다(21절). 그러나 그 도를 붙드는 사람에게 구원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능력(18절)이 흘러든다. 그는 참된 지혜자로 거듭난다.
십자가에 대한 관점이 인생의 향방을 결정한다. 어떤 이에게는 함량 미달의 우스갯소리요, 어떤 이에게는 귀에 거슬리는 불쾌한 신화다. 당신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요, 구원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하는가? 그 십자가의 도를 견고히 붙들고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 채청호

간암 걸린 남편이 “나 여자 있어”라고 고백한다면?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 채정호 저자와의 만남

페이스북 트위터 미투데이 요즘 싸이월드 공감
지난 5월 28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은 ‘애도치유카페’로 변신했다. 최근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를 펴낸 채정호 교수가 카페 주인장으로 변신했다. ‘애도하는 사람이 건강하다’를 주제로 상실의 슬픔을 잘 떠나보내는 것에 대해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1
글 | 김이준수 사진 | 출판사 제공
최근 칸영화제에서 <스틸 더 워터>라는 신작을 선보인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2007년작 <너를 보내는 숲>. 이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별(상실)에 대처하는 자세’ 때문이었다. 느닷없는 이별 앞에,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던 이들이 주인공이다. 상실의 슬픔을 품은 이들은 눈물, 즉 ‘티어스테라피(tears therapy)’를 통해 이별을 감내한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 생(生)임을 받아들인다. 나는 이 영화를 이렇게 읽고 있었다. “이별은 만남만큼이나 중요하며, 이별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살아있음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작가만남-채정호

지난 5월 28일의 봄밤에는 그렇게 <너를 보내는 숲>이 떠올랐다. 이날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은 ‘애도치유카페’로 변신했다. 최근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를 펴낸 채정호 교수(가톨릭의대, 정신과 전문의)가 카페 주인장으로 변신했다. ‘애도하는 사람이 건강하다’를 주제로 상실의 슬픔을 잘 떠나보내는 것에 대해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여전한 세월호 정국. 이 집단적 슬픔 앞에 우리는 어떻게 견뎌나가야 할까.

2
감정에 충실하게 복무할 것.
“감정이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나에게 슬픔의 감정이 움직였다면, 어떻게든 그 감정에 귀 기울어주는 것이 옳다. 그래야 그 슬픔의 감정으로부터 내가 아프지 않을 수 있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161쪽)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이다. 그러나 한국인들,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희로애락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고 채 교수는 지적했다. 상대적으로 화내는 것은 잘 하나, 기쁠 때 이것을 잘 표현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즐거움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것도 서툴다.

“슬프면 슬퍼야 한다. 희로애락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평상 시 그런 것이 별로 없다. 4년에 한 번 월드컵 하면 기쁘고(웃음). 평상시 기분이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감성적임에도 기쁠 때 기뻐하지 않는다. 화날 때는 화내면 되는데, 화를 안 낸다. 그러다 나중에 지랄을 하고(웃음). 장례식 가서도 울어야 한다. 요즘 세월호 관련한 정신과 치료를 맡고 있는데, 제대로 울 수 있게끔 도와주고 있다. 울어야 할 때 울어야 한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슬픔의 감정을 섣불리 억누르지 말자. 감정이란 본능적인 것이다.(중략) 슬픔이란 감정은 한치의 오차가 없다. 슬픔의 대가를 일시불로 치르느냐 아니면 할부로 치르느냐, 그것이 다를 뿐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169쪽)

우리는 뭔가 잃고 상실했을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 배운 적이 없다. 대신 어떻게 하면 얻을 것인지만 배운다. 돈, 성적, 집, 승진 등이 그것이다. 계속 얻어야 하는 것만 주입받는다. 삶은 그러나 얻을 수만 없다. 얻으면 잃는 것이 사는 것이다. 우리는 상실하고 잃었을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채 교수의 이야길 들으면서 도정일 교수의 말씀이 떠올랐다. 도 교수는 상실의 시간과 화해하는 기술을 언급했다. “마흔 이후의 사람들이 훨씬 중후해 보이는 것은 잃어버린 것들의 무게 때문이다. 그 무게와 함께 사람들은 어떤 기술을 터득하기 시작한다. 가슴이 어떻게 상실의 시간과 화해하는가라는 기술이 그것이다.”

상실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상실의 의미).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이 상실의 순간을 결코 피해갈 순 없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행복했던 결혼생활도 언젠가는 끝난다. 사별이나 이혼, 이 둘 중 하나를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부부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일도 그렇다.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언젠가는 은퇴의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중략) 삶이란 잃어버리는 것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라는 의미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18쪽)

살다보면 안다. 견디기 어려운 상실은 갑자기 찾아온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온다. 세월호도 그랬다. 4월 16일 이전까지는 아무 일 없었다. 그러나 그날이후 아픔과 슬픔이 갑자기 닥쳤다. 전쟁도 그러하며 교통사고도 그렇다. 채 교수는 이별은 내가 원하지 않는 시점에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힘들어진다. 예고 없는 이별, 준비 없는 상실. 그렇기에 묻는다.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상실을 맞닥뜨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채 교수에 의하면, ‘애도(哀悼)’를 잘 해야 한다. 애도의 사전적 정의를 보자.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했을 때의 정신적 충격과 그에 따른 심리적 반응과 진행 과정. 즉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과 그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모든 것과 이별한다. 결혼의 끝은 무엇일까. 이혼이나 사별이다. 대언이 있나? 없다! 아들, 딸을 사랑해도 그 관계의 끝은 무엇일까. 내가 죽거나 아이가 죽거나. 물론 의절도 있겠지만. 모든 관계의 끝은 안 보거나 없어지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모든 것과 이별하는 것, 너무 두렵지. 굉장히 좋아하면 이별이나 상실이 굉장히 힘들어진다. 어떤 것도 아픔을 치유할 수 없다. 사실 치유나 힐링은 개소리다(웃음). 치유는 안 된다. 상담 받으면 치유가 된다고? 치유,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영화 <상실의 시대>에 나온 와타나베의 말을 인용했다. “나오코가 내게 가르쳐준 건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진정한 치유란 없었던 일처럼 상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상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나의 상처를 인정하고 그 다음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33쪽)

상실로 인한 심리적 문제들(상실의 상처).
그렇다면 상실로 인한 문제는 어떻게 풀면 좋을까. 채 교수는 자신과 상담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30년을 함께 산 남편이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간암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남편은 그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며, 남은 3개월 사랑하는 이와 살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것도 10년이나 된 사이. 아내는 묵묵하게 남편의 소원을 들어줬다. 그러나 남편이 죽고, 아내는 화병이 나서 채 교수를 찾아왔다.

“화병이 안 오면 이상한 거다. 부인이 쿨하게 장례까지 치르고 완전히 무너졌다. 다시 세우는데 7~8년이 걸렸다. 그만큼 치유가 안 된다. 자기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화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럴 땐 화를 내야 한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부인이 화 한 번 안 냈다. 상실이 있을 때 화가 나는 건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화가 계속 나는 건 문제다. 화가 계속 간다면 우울이다. 우울한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나 계속 가는 것은 나쁘다.”

“화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무조건 참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차별적으로 표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화의 감정은 정직하다. 따라서 화가 났다고 수치스럽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어떻게 반응할지가 더 중요하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79쪽)

그는 ‘망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감정을 눌러 놓으면 반드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기억해야 할 것을 눌러놓으면 어느 순간 생뚱맞게 튀어나온다. 너무 누르기 때문에 계속 가고 병이 된다. 이것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다. 불안 역시 상실 후 찾아올 수 있는 감정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전국은 지금 ‘범불안장애주의보’가 내린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화나 우울처럼 계속 가는 것은 문제다. 중독에 빠지는 이유다. 중독은 뭔가를 대체하기 위해서 온다는 것. 술을 많이 마시거나, 도박에 빠진다. 혹은 물건을 사는데 열중하는 쇼핑 중독에 빠진다. 아울러 충동적이 되거나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냉소적으로 빠지는 경우도 있다. 실연 뒤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해당된다.

“애도의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뤄지지 위해서는 과거의 삶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즉 과거의 상태를 버리는 것이 애도의 핵심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100쪽)

상실의 슬픔을 잘 떠나보내는 법(상실의 치유).
“동양철학에서는 애이불상(哀以不傷)이라 하여 슬퍼하되 마음이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건강한 슬픔이라고 말한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85쪽)

채 교수는 거듭 강조했다. 치유는 안 되나, 우리는 살아야 한다. 이에 잘 사는 방법 몇 가지를 제시했다. 우선, 잘 우는 것(눈물). 물론 계속 울어선 안 된다. 울 때 우는 것. 시도 때도 없이 우는 우울도 있는데, 이것은 우울증이라는 병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것이다. 적절하게 슬퍼하고 눈물 흘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신경을 써야 한다.

“나 스스로 슬픔의 통로를 만들고, 그곳으로 상실의 감정들을 흘려보내야 한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충분히 슬퍼하고 마음껏 우는 것이다. 나에게 슬퍼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하는 것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153쪽)

또 하나는 말, 즉 이야기다. 내 상태나 감정이 어떠한지 이야기할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왜 훌륭할까. 그는 어떤 개소리라도 진지하게 들었다. 그의 원칙은 이랬다. 진지하게, 공정하게. 우리는 진지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게 이야기한다.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잘 못한다. 진지하게 공정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다. 진지하게 공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딱 한 사람을 만들어라. 그게 없으면 돈을 내고 정신과에 오는 거다. 진지하고 공정하게 이야기를 들어줄 한 사람이 필요하다. 힘든 사람에겐 진지하고, 공정하게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진지하고 공정하게 이야기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상실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세 가지는 울기, 말하기, 시간이다. 정말 견디지 못할 정도면 치료를 받아도 된다는 것이 채 교수의 말이다. 상실의 슬픔이 병적으로 남아 있지 않는다면 치유과정에서 얻을 것만 얻으면서 시간과 함께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얻지 못하면 달라지지 못한다. 그러면 상처를 누르면 튀어 오르는 과정을 되풀이하게 된다.

“만약 누군가를 잃는다면 그 전의 나와 같은 사람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나다. 내가 아닌 게 아니다. 내가 잃어버린 전의 모습에 익숙해서 내가 아닌 것 같은데, 그 잃어버린 것도 나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없다고 정말 없는 걸까? 지금 없다고 그 사람과 살았던 시간이 없는 것일까? 치유와 회복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런 순간을 ‘딜리트(delete)’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내가 같이 있었던 사람은 내 안에 있다. 같이 있는 것이다.”

아무렴.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에는 상실을 잘 애도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온다. 국제자원봉사를 나갔다가 전염병에 걸려 죽은 딸. 어머니는 딸이 그렇게 원했던 국제자원봉사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다. 나도 살고 딸도 사는 방법을 택한다. 마크 롤랜즈의 『철학자와 늑대』가 떠올랐다.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형성하도록 도와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기억할 가치가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이 만들어 준 사람의 모습으로 사는 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그들을 존경하는 방법이다.”

채 교수는 상실과 이별을 내 삶의 사실로 받아들일 것을 거듭 강조했다. 그것은 순서적, 시간적 문제라는 것. 이별하면 끝이 아니다. 잃어버린 나도 내 삶이다.

“세월호 이후 내 자식이 살아 있어서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많이 아프다. 아프지 않으려고 하지 말자. 아파도 된다. 아픈 것만큼 기쁜 것도 누리고, 대체는 안 되지만, 다른 것에 기쁨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녀를 잃고 죄책감 등으로 부부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 자녀에 대한 이야기, 내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기 때문이다. 울고 싶으면 울고 말해야 한다. 시간도 필요하다.”

“상실의 문제에는 시간의 원칙이 적용된다. 물론 상실의 대상과 자신의 심리적 자원에 따라 애도 기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중략) 분명한 사실은 그 누구도 상실의 시간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나의 속도에 맞추어 애도의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것이 중요하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92쪽)

내 인생에 있었던 것을 ‘딜리트’ 키를 누른다고 없앨 수 없다. 라캉 왈, “애도는 산 자에게 욕망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즉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애도다. 그 중에 가장 사랑해야 하는 것이 나다. 자녀를 잃어버린 나, 남편을 잃어버린 나, 그런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게 애도다.

“치유는 안 되나, 안 돼도 괜찮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다. 30여년 정신과 의사로 있지만, 나도 어린 시절의 상처가 치유 안 되더라. 그래도 괜찮다. 꽤 괜찮다. 치유는 안 됐지만 나름대로 살 수 있다. 그러니 쫄지 마라. 그래도 살 수 있다. 병나지 않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내 모습이 괜찮을 수 있다. 내 삶이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울고, 때론 말하고, 때론 시간 보내고, 그러면 괜찮다.”

정신의학적으로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비워낼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콤플렉스도 있고, 어려움도 있고, 내가 비우고 싶고 지우고 싶은 덩어리가 있을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도 나다. 그 아픔이 없기를 원하는 거지. 딱 그 시간, 그 상처만 없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건 아니잖나. 그걸 도려내면 내 인생이 아니다. 나빠지지 말고 망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인생에서 지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지난 모든 것이 쌓인 것이 지금의 나다. 나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 지우려고 하지 말고 같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

“상처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또 소중한 사람을 잃고 슬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은 온전히 계속되어야 한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45쪽)

극소수지만, 이지선 씨는 엄청난 상실을 당하고 난 뒤 훌륭하게 승화를 했다. ‘외상 후 성장’이라는 표현도 쓰던데, 상실이나 상처가 삶의 새로운 전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나?

많은 연구들이 있는데, 힘든 일을 겪고 더 커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있긴 하나, 많지 않다. 열 명 중 한 명 정도다. 또 열 명 중 한 명은 병이 나고 망가진다. 나머지 여덟이 보통의 사람들이다. 자기 인생을 돌아보거나 조금 나아지거나 그냥 산다. 좀 더 큰 나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상시에 건강한 사람, 원래 자존감이 있는 사람이 좋아진다. 원래 어땠느냐가 중요하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트라우마나 충격에 따라 다르긴 하나, 대개는 삶의 목적이나 가치가 있는 사람들, 삶에 사랑의 흔적이 많은 사람들이 회복을 잘 한다. 우리 모두는 상실을 겪는다. 외상 후 성장을 하려면, 주변의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 살면 된다. 그러면 끔찍한 일을 겪어도 회복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정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가 살 길은 사랑하는 것이다. 치유는 안 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사랑해라.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낸 경험은 더없이 소중한 인생의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이란 다른 이와 관계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배워가는 일이 아닌가.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상처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상실은 그만큼 열렬히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흔적이다. 사랑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고마운 아픔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202쪽)

2014-07-03.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다. 세상의 지혜로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로 사람을 구원하신다. 그리고 구원받는 사람들에게 그 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18-25
한글본문.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영어본문.
18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19 For it is written: “I will destroy the wisdom of the wise; the intelligence of the intelligent I will frustrate.” 20 Where is the wise man? Where is the scholar? Where is the philosopher of this age? Has not God made foolish the wisdom of the world? 21 For since in the wisdom of God the world through its wisdom did not know him, God was pleased through the foolishness of what was preached to save those who believe. 22 Jews demand miraculous signs and Greeks look for wisdom, 23 but we preach Christ crucified: a stumbling block to Jews and foolishness to Gentiles, 24 but to those whom God has called, both Jews and Greeks, Christ the power of God and the wisdom of God. 25 For the foolishness of God is wiser than man’s wisdom, and the weakness of God is stronger than man’s strength.

도움말.
전도(21절). 헬라어 ‘케리그마’로서, 복음의 내용과 그 전달 방식 모두를 포괄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24절)?
⬇ 아래로 인간. 구원을 받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가(18절)?
? 물어봐.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신 방법은 무엇인가(21절)?
! 느껴봐. 나는 일상 속에서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십자가의 도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더욱 풍성히 체험하기 위해 삶 가운데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Meditation. 뒤집어진 가치와 십자가의 도
세상의 가치체계가 전복되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지혜와 미련한 것의 가치를 뒤집으셨다(20절). 전복된 가치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으로 치부되었다(18절). 게다가 유대인들은 십자가 대신에 표적 곧 기이한 현상을, 헬라인들은 지혜 곧 이성적 증거를 가져 오라고 요구했다. 왜곡된 세상의 가치체계 속에 십자가의 복음이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 그대로 연착륙할 수 없었다.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를 가져오기 위해 선택된 것은 ‘전도’라는 미련하게 보이는 방식이다(21절). 그러나 그 도를 붙드는 사람에게 구원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능력(18절)이 흘러든다. 그는 참된 지혜자로 거듭난다.
십자가에 대한 관점이 인생의 향방을 결정한다. 어떤 이에게는 함량 미달의 우스갯소리요, 어떤 이에게는 귀에 거슬리는 불쾌한 신화다. 당신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요, 구원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하는가? 그 십자가의 도를 견고히 붙들고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7-02. QT큐티체조.

간단설명. 고린도 교회 안에는 분쟁이 있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오직 예수님임을 밝히며 그의 안에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연합할 것을 권고한다.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10-17
한글본문.
1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영어본문.
10 I appeal to you, brothers, in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that all of you agree with one another so that there may be no divisions among you and that you may be perfectly united in mind and thought. 11 My brothers, some from Chloe’s household have informed me that there are quarrels among you. 12 What I mean is this: One of you says, “I follow Paul”; another, “I follow Apollos”; another, “I follow Cephas”; still another, “I follow Christ.” 13 Is Christ divided? Was Paul crucified for you? Were you baptized into the name of Paul? 14 I am thankful that I did not baptize any of you except Crispus and Gaius, 15 so no one can say that you were baptized into my name. 16 (Yes, I also baptized the household of Stephanas; beyond that, I don’t remember if I baptized anyone else.) 17 For Christ did not send me to baptize, but to preach the gospel–not with words of human wisdom, lest the cross of Christ be emptied of its power.

도움말.
말, 뜻(10절). 말은 헬라어 ‘로고스’로서 ‘언변’(1:5)과 같은 뜻이며, 뜻은 ‘그노시스’로서 지식(1:5)과 같은 단어다. 바울은 두 개념을 서로 대칭시키며 논지를 풀어간다.
합하라(10절). 헬라어 ‘카탈티조’로서, 원래는 찢어진 그물을 깁는 행위를 뜻한다(마 4:21, 막 1:19).
말의 지혜(17절). 당시 연설과 웅변에 사용한 수사학적 기술을 의미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보내신 목적은 무엇인가(17절)?
⬇ 아래로 인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11-12절)?
? 물어봐. 성도들이 공동체 안에서 분쟁 없이 온전히 합하는 방법은 무엇인가(10절)?
! 느껴봐. 나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같은 뜻으로 연합하는 일에 열심인가?
➡ 옆으로 실천해.
공동체 안에서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연합하기 위해서 내가 더욱 힘써야 할 점들은 무엇인가?

Meditation. 하나 됨의 구심점, 십자가
고린도 교회는 은사도 많았지만 분쟁도 많았다. 은사와 분쟁이 교회 내에 양립했다.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1:5)을 뛰어넘어 같은 말과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할 것을 명한다(10절). ‘모든 것’보다 ‘같은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치와 연합을 위해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들 앞에 세운다. 같은 말과 같은 지식과 같은 뜻은 오직 교회의 유일한 근거이자 구심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 때 가능한 것이다. 십자가 언덕에 함께 올라가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하고 둘러서서,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야 안에서 사람을 보고 공동체를 볼 때 진정한 하나가 될 수 있다.
‘모든 것’보다 ‘같은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서로를 봐야 한다. 당신은 지금 십자가 언덕에 올라 있는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그 시야 안에서 사람들을 보고 있는가? 십자가를 통해 사람과 공동체를 보기 위해서 당신이 내려놓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7-01. QT큐티체조. 고린도전서 시작합니다.

간단설명.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전하면서 편지를 연다. 먼저 그들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을 기원한다.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1-9
한글본문.
1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영어본문.
1 Paul, called to be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the will of God, and our brother Sosthenes, 2 To the church of God in Corinth, to those sanctified in Christ Jesus and called to be holy, together with all those everywhere who call on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their Lord and ours: 3 Grace and peace to you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4 I always thank God for you because of his grace given you in Christ Jesus. 5 For in him you have been enriched in every way–in all your speaking and in all your knowledge– 6 because our testimony about Christ was confirmed in you. 7 Therefore you do not lack any spiritual gift as you eagerly wait for our Lord Jesus Christ to be revealed. 8 He will keep you strong to the end, so that you will be blameless on the day of our Lord Jesus Christ. 9 God, who has called you into fellowship with his Son Jesus Christ our Lord, is faithful.

도움말.
사도(1절). 헬라어 ‘아포스톨로스’로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교회(2절). 헬라어 ‘에클레시아’로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이라는 뜻으로, 고대 근동 도시국가에서 공공 이익에 관련한 문제를 토의하고 결정하고자 시민들을 소집해 모인 집합체를 지칭했다.
모든 언변(5절). 언어를 매개로 하는 모든 종류의 영적인 은사 곧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방언, 예언 등을 의미한다(고전 12-13장).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주님이 성도들을 위해 행하시는 일은 무엇인가(8절)?
⬇ 아래로 인간.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2절)?
? 물어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은 무엇인가(9절)?
! 느껴봐. 나는 예배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모든 삶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더욱 풍성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변화되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Meditation. 부르심과 부름이 만나는 곳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신다. 성도로 부르시고(2절), 사도로 부르신다(1절). 성도로 불러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교회가 되게 하시고, 사도로 불러 다시 세상으로 보내신다. ‘오라는 부름’과 ‘가라는 부름’이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각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르고 인정하며 그 부르심에 순종한다(2절). 상호 부름, 곧 사람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과 주님을 향한 사람의 부름이 서로 만나며 참된 교제(코이노니아)를 누린다(9절). 고린도 교회는 그 와중에 태동했다. 죄악의 ‘도시 고린도’와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의 공존(2절)은 그 자체로 역설이며 모순이다. 교회는 이처럼 세상과 역설적, 모순적 관계성을 가진다. 하나님은 이러한 교회가 되도록 은혜를 주시고 주님이 재림하실 날까지 견고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주 되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응답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교회가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도시 고린도에서 태동한 것처럼 각처에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인정하며 거룩한 교회로 세워지고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첫 사랑의 회복은?

오해 풀기: 첫 사랑의 회복은 하나님에 대한 뜨거웠던 첫 사랑 회복? NO!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 2:4).

첫 사랑의 회복, 우리가 모두 얼마나 갈망하고 몸부림치는 것인가? 처음 믿을 때, 혹은 성령 체험(?)을 통해 뜨거웠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새벽예배, 철야예배, 부흥집회를 쫓아다니며 부르짓고 결심하고 또 결심해도, 가슴을 뜨겁게 할 신앙 서적을 뒤적여도 처음 사랑은 회복이 잘 안 된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책망받는다. 여기서 에베소 교회가 회복해야 할 “처음 사랑”은 과연 하나님에 대한 뜨거움일까? 많은 기독교인이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가슴 설레던 뜨거웠던 사랑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 항상 뜨거운 사랑이란 허구다. 누구나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처음에는 못 견딜 정도로 불타오르던 사랑이라도 서서히 식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안다. 뜨거운 사랑의 시절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뿐 영원할 수가 없다. 아무리 갈망해도 예외는 없어 보인다. 사랑에 빠졌을 때의 풋풋한 가슴 설렘과 뜨거움이 식는 것을 막는 방법을 발견한 사람은 이 세상엔 없다. 현실적으로 안 보면 죽을 것 같은 모든 것을 다 불태울 것 같던 뜨거움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사랑은 아무리 붙잡고 싶은 행복이라도 일시적인 현상이다(이런 사랑 안 해본 사람에겐 미안하다! ^^). 본문은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회복하라고 명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에베소 교인들이 회복해야 할 처음 사랑은 다른 성경 구절들처럼 서로에 대한 사랑, 즉, 형제자매에 대한 처음 사랑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다(참조 엡 1:15; 골 1:4; 살후 1:3). 일일이 찾기 귀찮아하는 독자들을 위해 성경 구절들을 직접 인용하니 천천히 읽어 보길 바란다.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엡 1:1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골 1:4).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살후 1:3)

물론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과 성도 모두를 포함하는 때도 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 6:10).

그러나 요한계시록 본문에서 첫 사랑을 버린 것에 대한 대조 대상이 이단인 니골라 당에 속한 이들의 행위에 대한 “미움”(계 2:6)인 것을 볼 때 에베소 교인들이 회복해야 할 “처음 사랑”은 성도를 향한 사랑일 가능성이 높다. 이단적인 무리를 미워하므로 올바른 신앙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성도 사랑을 하지 않을 때 바른 교리를 지켜도 문제가 된다. 오늘날 구원파나 신천지를 반대하는 것으로 교회의 순수성이 지켜지고 정체성이 확립된다고 생각하면 큰 일이다. 무엇보다 성도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받을 때 이는 성도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라고 권면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감성적인 설렘이나 뜨거움이 아니라 오래 참아주고 온유하고 친절하며 무례하게 행치 않고 진실함 같은 가치에 기반을 둔 인격적인 사랑일 것이다.

“제발 설교와 기도 시간에 계시록 2장 4절을 들어 하나님에 대한 첫 사랑을 회복하자는 말 그만하자. 성경 제대로 알고 전하자!”

“신앙 오해와 진실” 속편 내용 중에서….
계속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