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04.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성전에서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음을 언급하시면서, 가르침을 받는 이들에게 외식하는 사람들을 삼가라고 명하시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해 평하신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2:35-44
한글본문.
35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38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영어본문.
35 While Jesus was teaching in the temple courts, he asked, “How is it that the teachers of the law say that the Christ is the son of David? 36 David himself, speaking by the Holy Spirit, declared: ” ‘The Lord said to my Lord: “Sit at my right hand until I put your enemies under your feet.” ‘ 37 David himself calls him ‘Lord.’ How then can he be his son?” The large crowd listened to him with delight. 38 As he taught, Jesus said, “Watch out for the teachers of the law. They like to walk around in flowing robes and be greeted in the marketplaces, 39 and have the most important seats in the synagogues and the places of honor at banquets. 40 They devour widows’ houses and for a show make lengthy prayers. Such men will be punished most severely.” 41 Jesus sat down opposite the place where the offerings were put and watched the crowd putting their money into the temple treasury. Many rich people threw in large amounts. 42 But a poor widow came and put in two very small copper coins,worth only a fraction of a penny. 43 Calling his disciples to him, Jesus said, “I tell you the truth, this poor widow has put more into the treasury than all the others. 44 They all gave out of their wealth; but she, out of her poverty, put in everything–all she had to live on.”

도움말.
렙돈, 고드란트(42절). 렙돈은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되던 화폐 중 가장 작은 단위로서, 두 렙돈, 즉 한 고드란트는 당시 성인 남자 숙련공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64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고드란트는 로마 독자들을 고려해 환산한 단위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성전에서 예수님은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35절)?
⬇ 아래로 인간.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37절)?
? 물어봐.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38절)?
! 느껴봐. 내게 외식하는 종교인의 모습은 없는가?
➡ 옆으로 실천해.
내가 형식에서 벗어나 진실하게 변화되어야 하는 모습은 무엇인가?

Meditation. 외식과 형식이 난무하는 성전
예수님이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그 주재권을 인정한 것을 가르치시는 상황에도 서기관들은 스스로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원하고(39절), 긴 옷을 입고 문안 받으며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려 했다. 예수님은 신앙의 본질을 상실한 채 외식과 형식으로 일관하는 그들을 삼가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당시 헌금함은 누가 얼마를 넣는지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41절). 서기관들의 외식과 부자들의 형식적 봉헌 행위가 당시 과부와 같은 연약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가산(40절)과 모든 소유와 생활비 전부(44절)까지 내어놓을 수밖에 없도록 압력을 가하는 결과가 됨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이 받을 중한 판결을 예고하신다.
길게 기도하는 것(40절)과 많은 헌금을 드리는 것(41절)도 능사는 아니다. 그것이 외식이며 형식뿐이라면 상급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고, 연약한 이웃을 향해 소유를 나누어야 할 교회의 본질을 놓칠 때 그 앞에는 판결이 기다린다. 믿음의 본질을 단단히 붙들기 위해 당신이 극복해야 할 외식과 형식의 문제는 무엇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3-03. QT큐티체조.

간단설명. 한 서기관이 첫째 되는 계명을 묻자 예수님은 첫째가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답하신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2:28-34
한글본문.
28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영어본문.
28 One of the teachers of the law came and heard them debating. Noticing that Jesus had given them a good answer, he asked him, “Of all the commandments, which is the most important?” 29 “The most important one,” answered Jesus, “is th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the Lord is one. 30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31 The second is this: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There is no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32 “Well said, teacher,” the man replied. “You are right in saying that God is one and there is no other but him. 33 To love him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understanding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to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s more important than all burnt offerings and sacrifices.” 34 When Jesus saw that he had answered wisely, he said to him, “You are not far from the kingdom of God.” And from then on no one dared ask him any more questions.

도움말.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28절).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6백여 조항으로 구분하고 그 경중을 따지는 데 많은 수고를 들였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32절)?
⬇ 아래로 인간.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30절)?
? 물어봐. 이웃 사랑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31절)?
! 느껴봐. 나는 나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겠는가?

Meditation. 가장 큰 계명, ‘Love 2+1’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첫째 계명에 대해 질문한다. 예수님은 두 차원에 걸친 사랑 곧 하나님께 대한 사랑(신 6:5)과 이웃에 대한 사랑(레 19:18)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답하신다. 그런데 그 두 사랑의 대상 사이에 사랑의 대상이 하나 더 숨어 있다. 바로 ‘네 자신’이다(31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도 불가능해진다. 질문한 서기관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33절)의 중요성을 고백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참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다. 볼링으로 말하면 스트라이크를 치기 위해 공략해야 하는 5번 핀 곧 킹핀(king pin)이다. 그 계명의 요구에 적중할 때 모든 계명의 요구들에 적중할 수 있다. 주님은 당신에게 오직 사랑을 명하신다.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또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왜 주셨을까? 현대용어버전.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왜 주셨을까요? 오해는 이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나 율법이 부당한 게 아니라 지키지 못하는 우리 형편이 참혹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걸 모른다는 사실이고 율법이 하는 한 가지 기능은 바로 이 점을 각성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율법 자체가 정당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참혹한 처지로부터 벗어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소스코드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 소스코드는 ‘그리스도’이고 접속 암호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라는 소스코드에 접속하면 ‘은혜’가 다운로드됩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신자가 전에 죄에 매여 종노릇할 때는 지킬 수 없었던 율법을 지키게 하는 에너지이며, 우리 DNA에 감염된 바이러스 곧 ‘죄’를 퇴치하는 ‘백신’이며 하나님이 애시당초 약속하셨던 복과 풍요를 누리게 하는 솔루션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소스코드에 ‘믿음’이란 접속 암호로 접속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100 byte 수준 어떤 사람은 1 메가 또 다른 사람은 10 메가 혹은 100메가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속도저하의 직접적 원인은 재리와 일락등이 기운을 막거나 그리스도라는 소스코드에 접속했다기보다 처음부터 약간의 와이파이를 나눠쓰는 일반은총의 빛아래 있어서 환란이 닥치매 소스코드와 연결이 끊어져 결실치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부지런히 영적 디바이스 즉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해서 접속과 다운로드를 반복하지 않으면 누구도 승리할 수 없으며 율법은 지킬 수 없습니다. 현재 자신의 상태를 기준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없다는 논쟁은 그런 점에서 출발선상이 근본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루이스의 펫북에서>

2014-03-02. 주일에는 읽는 QT큐티. 일곱교회 이야기 5. 두아디라 교회.

간단설명. 믿음은 회개의 상태를 산출하면서 자기 자신을 입증한다. - 존 오웬

성경본문. 요한계시록 2:18-23
한글본문.
18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영어본문.
18 “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Thyatira write: These are the words of the Son of God, whose eyes are like blazing fire and whose feet are like burnished bronze. 19 I know your deeds, your love and faith, your service and perseverance, and that you are now doing more than you did at first. 20 Nevertheless, I have this against you: You tolerate that woman Jezebel, who calls herself a prophetess. By her teaching she misleads my servants into sexual immorality and the eating of food sacrificed to idols. 21 I have given her time to repent of her immorality, but she is unwilling. 22 So I will cast her on a bed of suffering, and I will make those who commit adultery with her suffer intensely, unless they repent of her ways. 23 I will strike her children dead. Then all the churches will know that I am he who searches hearts and minds, and I will repay each of you according to your deeds.

Meditation. 두아디라교회. 회개하고 돌이키라.
두아디라교회는 에베소교회와 아주 유사하게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라는 귀한 신앙적 덕목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주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에베소교회에 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고, 주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사랑과 믿음을 동력으로 하여 섬김과 인내의 삶을 살아낸 수준 있는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 속에서 우리는 존재(Being)와 사역(Doing)이 멋지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렇듯 아름답게 균형 잡힌 영성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결함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을 용납한 것입니다(20절). 교회를 교란하는 사악한 교사의 이름을 이세벨로 지칭하는 것은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을 심히도 괴롭혔던 악의 화신 이세벨을 또렷하게 생각나게 만듭니다. 아마도 이세벨로 불렸던 이 사람은 순수한 기독교 신앙을 로마 사회가 요구하는 우상을 섬기는 생활로 교묘하게 희석시켰던 것 같습니다. 로마의 혼탁한 문화와 정신에 기독교적 성결을 다치지 않고 타협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그럴듯한 거짓 주장은 많은 성도를 타락의 길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미혹하는 이세벨과 그 추종자들에게는 무서운 형벌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임하게 되는 형벌은 단순히 죄와 관련이 있기보다는 회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그 회개하지 않는 죄에 대해 최종적인 심판을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21-22절). 이러한 모습은 요한계시록이 힘주어 강조하는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은 오래 참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패역에 대해 답답하리만큼 인내하며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정한 때까지만 기다리십니다. 주님의 인내를 악용하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고난의 침상에 던져지는 형벌이 주어질 것입니다(22절). 주님이 이세벨에게 오래 참으셨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더 인내하실까요? 그 분의 오래 참고 기다리심에 감사를 드리며, 또 다시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주님 앞에 돌이키는 삶을 사는 하루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저를 향하신 인내를 악용하지 않고 늘 깨어 돌이키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메시지의 성경적 균형을 위해 도움이 되는 글’의 이해를 돕는 글. 5-2

장기영|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학부(신학과, 1994년 졸업)와, M.Div.(1996), Th.M.(1999) 과정을 졸업 후, 5년간 군목으로 사역하였으며, 전역 후 미국의 Asbury Theological Seminary(M.A., 2006)와 영국의 The University of Manchester(Ph.D., 2012)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였다. 현재는 서울신학대학교와 평택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 글은 저자의 동의하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월간지 ‘활천’에 연재되고 있는 글을 가져왔습니다. ‘메시지의 성경적 균형을 위해 도움되는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합니다.>

한없는 사랑에 감동을 받고,
자유의지에 대하여.

지난호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노예의지론을 알아보았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마귀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죄를 벗어나거나 선을 택할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마귀를 내쫓고 그 의지를 다스리시면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피동적으로 믿음과 경건한 삶을 살게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듯 보이는 믿음이나 선행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생각할 때에라야, 인간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 교단 헌법 제2장 제16조는 존 웨슬리의 신학적 입장을 따라“의지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면 이는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주장처럼 공로사상이나 율법주의의 문을 열어놓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즉 모든 것을 아시고, 한 마리 새의 움직임까지, 즉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인데(마 10:29-30),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완벽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작은 균열이라도 만들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결국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인하는 것 아닐까요? 웨슬리는 이런 위험성을 몰랐을까요?

이런 문제들에 직접적으로 답하기보다 먼저 성결가족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의지가 말[馬]이라면 하나님은 그 위에 올라탄 기수라는 설명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 느껴지시는지요?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교도소의 교도관과 죄수, 유격장의 조교와 훈련병, 혹은 스파르타식 입시학원의 강사와 학생의 관계같이 통제와 순응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으시는지요? 만약 부모가 자식과의 관계를 이렇게 전적인 통제와 순응으로 설정을 한다면, 저로서는 그 엄격함과 답답함을 견딜 수 없어 가출이라도 했을지 모릅니다. 비록 부모다움, 교사다움, 심지어 하나님다움에 자녀, 학생, 인간에 대한 통제와 권위의 행사가 포함된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그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표현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전지전능하심을 부인하려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하나님 수준으로 높이거나, 하나님을 인간 수준으로 낮추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주권자로서 영원히 예배와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찬양하면서도, 다만 하나님께서 주권과 전지전능하심을 나타내시는‘방법’에 웨슬리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신 아담을 축복하셨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능력에 따라 점점 많은 자유를 허용하고 책임도 맡기듯,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주신 지혜와 능력에 부합하도록 하나님의 통치 영역 일부를 맡기셔서 자연세계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창 1:26-28). 하나님께서 만드신 생물의 이름 짓는 일을 아담이 담당한 것은, 아담이 허락받은 영역 속에서 행사할 자유와 권세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존중하시고 인정하신 것을 의미합니다(창 2:19). 즉,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을 허락하신 영역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직접적 권세를 사용하시기보다는 스스로 뒤로 물러나 그저 지켜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시면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하심이 훼손될까요?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하심을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라는 지침 – 가령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 – 그리고 그 지침을 어길 시에 내려질 형벌을 통해 여전히 행사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불순종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거역을 당하고, 주권이 무시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적 주권은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들을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이키시는 데서 드러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통제하거나 압도하는 방법으로 인간을 다루시기보다는, 인간의 자유를 여전히 존중하는 가운데 그의 사랑과 공의, 선하심과 지혜 등을 모두 동원하여 아주 인격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설득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기 의지가 꺾여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에 감동을 받고 그 끈질긴 설득에 항복하여, 하나님께서 강제하시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의 품을 찾아 안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느끼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어린 자녀가 어머니의 수고를 다 알지 못해도 어머니는 아이를 탓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 차곡차곡 쌓여진 사랑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어머니께 대한 성숙한 감사로, 또 언젠가는 연약해진 어머니를 위한 수고와 섬김으로 나타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무시당하는 것 같고 주권이 훼손당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같이”강한 힘으로(아 8:6)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어, 자기중심적이고 반역적인 교만을 감사와 순종과 겸손으로 바꿉니다(고전 13:4-7). 결국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기를 자처할 정도가 됩니다. 사랑보다 강한 힘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이렇듯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두면서도 그 마음을 감동시켜 변화시키는 사랑의 전능하심이지, 강제를 통한 전능하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임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메시지의 성경적 균형을 위해 도움이 되는 글’의 이해를 돕는 글. 5-1

[자유의지와 노예의지1]

‘노예의지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장기영|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학부(신학과, 1994년 졸업)와, M.Div.(1996), Th.M.(1999) 과정을 졸업 후, 5년간 군목으로 사역하였으며, 전역 후 미국의 Asbury Theological Seminary(M.A., 2006)와 영국의 The University of Manchester(Ph.D., 2012)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였다. 현재는 서울신학대학교와 평택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 글은 저자의 동의하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월간지 ‘활천’에 연재되고 있는 글을 가져왔습니다. ‘메시지의 성경적 균형을 위해 도움되는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합니다.>

성결가족 여러분, 노예의지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마 처음 듣는 분이 많으실 것 같아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라 신학용어인 데다, 다른 교단 신학교에서 주로 가르치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저도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한 지 몇 해가 지나 처음 이 말을 접하고는 무척 생소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노예의지가 뭐지? 노예근성? 노예들만의 특성?’

노예의지가 자유의지와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렇다면 사람이 그저 꼭두각시라는 것이야?’하는 모종의 반발심과 함께, 누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궁금하여 자료를 찾아 읽고 함축된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되면서, 저는 혹 자유의지를 가르쳐온 우리 교단의 신학보다 오히려 노예의지가 성경적 가르침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그 논리에 깊이 설득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성결교회를 다녔고 신학교에서도 자유의지를 배운 저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먼저, 노예의지를 가르친 분들은 성 어거스틴이나 마틴 루터, 존 칼빈 등 기라성 같은 교회 지도자들이자 신학의 대가들이었습니다. 성경을 모르거나 사고력이 부족하거
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구절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 논리적으로 주장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들의 영적 권위와 경건한 목적의식은 순수하고도 강력해서, 어쩌면 노예의지를 반대하는 것은 은혜와 영광의 하나님께 반기를 드는 것이라는 두려움마저 갖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노예의지란 무엇일까요?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크게 동식물과 사람이 사는 눈에 보이는 세상과, 하나님과 천사들, 마귀와 귀신들이 활동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영향을 받고, 사람은 하나님과 마귀의 영향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노예의지론의 핵심입니다. 물론 영적 세계가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우리 교단도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그 영향이 어느 정도까지인가’에서 자유의지론과 노예의지론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마틴 루터의 설명을 한번 들어보세요.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서 있는 짐승과 같다. 만약 하나님이 그 위에 올라타신다면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원하고 행할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올라탄다면 인간의 의지는 사탄이 원하는 바를 원하고 행할 것이다. 누가 올라탈지를 인간이 선택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과 사탄이 인간의 의지를 지배하기 위해 싸운다.”

타락한 이후 인간은 스스로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탄이 죄인들의 의지를 지배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그 지배를 벗어날 능력이 없습니다. 누군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거룩한 삶을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을 내쫓고 그 사람을 전리품으로 획득하여 그의 의지를 지배하셨기에 가능합니다. 믿음과 거룩한 삶은 노예의지에 의해 피동적으로 되는 것이지, 자유의지를 통해 능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노예의지를 주장하는 것일까요? 결과적으로 그들의 주장이 성경적인지는 꼭 점검해야하겠지만, 먼저 그들의 의도부터 살펴보면, 그들은 인간의 오랜 고질병과도 같은 습성, 즉 나쁜 일에 대해서는 늘 하나님께 화살을 돌리면서 좋은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신에게로 돌리는 교만과 배은망덕, 간사함을 꺾어버리려는 것입니다. 회개도, 믿음도, 거룩한 삶도 우리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못박아버릴 때, 어떤 일에서든 하나님 영광을 도둑질하려고 방법을 찾는 하이에나 같은 우리의 습성은 좌절되고, 영광은 고스란히 하나님께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부정은 인간의 자부심, 인간의 자기 우상화, 인간의 마귀화를 막는 그들의 비장의 무기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과 거룩한 삶의 근원에 관하여“오직 은총으로”라는 말을“오직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사람의 의지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구원의 수단으로서“오직 믿음”을 해석할 때에도 믿음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사람이 믿음을 갖는 데 있어서도 신적 결정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구원과 거룩한 삶의
여부는 100% 믿음을 주실 것인지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여 어거스틴과 루터, 칼빈에게서 노예의지는 예정론과도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런 노예의지론이 인간의 책임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과 양립할 수 있을까요? 노예의지론에 따르면, 구원의 영광만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불신과 멸망까지 하나님께로 그 원인이 돌려지는 것이 아닐까요? 성경은 과연 신적 결정론만 가르치면서 인간의 의지는 아무런 선택 능력이 없는 것으로 묘사할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우리 교단 신학(기독교대한성결교회/웨슬리안)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 헌법 제2장 제16조는 “의지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자유의지는 무엇을 가르치는지 다음호를 기대해주세요.

2014-03-01. QT큐티체조. 대한 독립 만세!

간단설명. 사두개인들이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 사로잡혀 있음을 밝히신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2:18-27
한글본문.
18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영어본문.
18 Then the Sadducees, who say there is no resurrection, came to him with a question. 19 “Teacher,” they said, “Moses wrote for us that if a man’s brother dies and leaves a wife but no children, the man must marry the widow and have children for his brother. 20 Now there were seven brothers. The first one married and died without leaving any children. 21 The second one married the widow, but he also died, leaving no child. It was the same with the third. 22 In fact, none of the seven left any children. Last of all, the woman died too. 23 At the resurrection whose wife will she be, since the seven were married to her?” 24 Jesus replied, “Are you not in error because you do not know the Scriptures or the power of God? 25 When the dead rise, they will neither marry nor be given in marriage; they will be like the angels in heaven. 26 Now about the dead rising–have you not read in the book of Moses, in the account of the bush, how God said to him, ‘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27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You are badly mistaken!”

간단설명.
사두개인(18절). 내세와 부활, 영의 세계,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현세적인 유대주의 종파 중 하나다.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26-27절)?
⬇ 아래로 인간. 사두개인들의 오해와 곡해의 근본적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24절)?
? 물어봐. 부활한 사람은 어떤 존재와 같이 되는가(25절)?
! 느껴봐. 나는 신앙생활 중에 생겨나는 여러 가지 오해와 불신을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이해 속에서 해소하는가?
➡ 옆으로 실천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대가는 무엇인가?

Meditation. 우문현답 속에 드러난 하늘의 비밀
올무와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악의적인 질문이 예수님께 주어진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의 ‘형사취수법’(신 25:5-6)을 빌미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악의적이고 어리석은 질문을 되받아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더욱 선명하고 풍성한 진리를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사람은 부활 이후에 천사와 같이 된다고 가르치신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오해와 불신앙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통렬히 밝히신다.
신앙생활 중에 여러 가지 오해와 의혹들이 생겨나고 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붙들지 못하는 것은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공허한 사색과 논쟁에만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알면 풀리지 않는 믿음의 난제란 없다. 당신은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가? 이성과 상식으로 풀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의 능력과 신비 안에서 용납하고 있는가?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