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July 2014
2014-07-07. QT큐티체조.
간단설명. 하나님의 지혜는 오직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깨닫게 된다. 육에 속한 사람은 결코 알 수 없으며 오직 신령한 사람만이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알고 판단한다.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2:10-16
한글본문.
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영어본문.
10 but God has revealed it to us by his Spirit. The Spirit searches all things, even the deep things of God. 11 For who among men knows the thoughts of a man except the man’s spirit within him? In the same way no one knows the thoughts of God except the Spirit of God. 12 We have not received the spirit of the world but the Spirit who is from God, that we may understand what God has freely given us. 13 This is what we speak, not in words taught us by human wisdom but in words taught by the Spirit, expressing spiritual truths in spiritual words. 14 The man without the Spirit does not accept the things that come from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15 The spiritual man makes judgments about all things, but he himself is not subject to any man’s judgment: 16 “For who has known the mind of the Lord that he may instruct him?” But we have the mind of Christ.
도움말.
영(11절). 헬라어 ‘프뉴마’로서 하나님과 사람의 영 모두를 지칭하며, ‘생각하고 행동하는 실제적 인격’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마음(16절). 원문으로는 주님의 마음이라는 표현으로서, 구약의 ‘여호와의 영’(사 11:2)을 번역한 것이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성령은 어떠한 분이신가(10절)?
⬇ 아래로 인간. 육에 속한 사람의 내적 특징은 무엇인가(14절)?
? 물어봐.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은 사람은 무엇을 알게 되는가(12절)?
! 느껴봐. 내게 육에 속한 사람의 특성들은 없는가?
➡ 옆으로 실천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은 신령한 사람으로서 영적인 일을 분별하고 있는가?
Meditation. 위로 아래로 소통하는 영
바울은 전복되고 왜곡되어 있는 세상의 가치 체계 속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지혜와 통할 수 있는 채널은 ‘오직 성령’이라고 연거푸 강조한다(10, 12-13절).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성령을 통할 때 영적인 블라인드 스팟(blind spot), 곧 영적 사각지대와 수신불량지역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성령 안에서만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선물을 알 수 있고 그 선물을 풀고 활용할 수 있는 매뉴얼을 갖게 된다(12절). 또한 성령 안에 있는 사람만이 영적 안목으로 세상을 분별하는 잣대를 가지고 모든 것을 온전히 판단할 수 있게 된다(15절). 성령과 통할 때 위로 하나님을 알고(12, 14절) 아래로 세상을 분별할 수 있다(13-14절).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16절)을 가진 신령한 사람의 특징이다.
성령은 통하게 하시는 영이다. 하나님과 통하게 하며 세상과 통하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고 세상을 분별하고 판단하게 한다. 당신은 과연 위와 아래로의 소통을 누리는 신령한 사람인가? 그러한 소통의 인생을 살기 위해 어떠한 값을 지불해야겠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7-06. 주일에는 읽는 QT큐티. 신앙의 문방사우 1.
간단설명. 낮은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은 결코 위대해질 수 없다. - 프란시스 드 살레
한글본문.
사도행전 7:54-60
54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영어본문.
54 When they heard this, they were furious and gnashed their teeth at him. 55 But Stephen, full of the Holy Spirit, looked up to heaven and saw the glory of God, and Jesus standing at the right hand of God. 56 “Look,” he said, “I see heaven open and the Son of Man standing at the right hand of God.” 57 At this they covered their ears and, yelling at the top of their voices, they all rushed at him, 58 dragged him out of the city and began to stone him. Meanwhile, the witnesses laid their clothes at the feet of a young man named Saul. 59 While they were stoning him, Stephen prayed, “Lord Jesus, receive my spirit.” 60 Then he fell on his knees and cried out, “Lord, do not hold this sin against them.” When he had said this, he fell asleep.
Meditation. 먹, 나를 갈아서
스륵스륵. 벼루 위에 먹을 수직으로 세우고 일정한 힘을 주어 갈다 보면 우리의 정신 또한 곧추서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먹의 존재 전 모습은 소나무입니다. 소나무를 태워 그을음을 만들고, 그 그을음을 아교로 뭉쳐서 먹을 만듭니다. 자신을 죽이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물건이 바로 먹입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 어렵게 만들어진 먹이 벼루 위에서 몸뚱이가 갈려 사라지는 과정은 참 허망해 보입니다.
먹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갈아서 다른 이들이 쓸 수 있도록 내어주고자 존재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필연적으로 ‘생김과 사라짐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인생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배울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모습은 벼루 위에서 갈려 사라지는 먹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에 대해 증거할 때는 많은 사람이 회심하고 돌아왔지만, 스데반의 경우엔 정반대였습니다. 전무후무한 명설교 후에 돌아온 건 사람들의 분노어린 돌팔매질이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쉬 만들어지지 않는 탁월한 복음의 일꾼임에도 그의 마지막은 참 허망해 보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사라짐은 영원한 무(無)가 아닙니다. 소임을 다했을 때, 그는 생명의 씨앗을 낳았고 사명은 이어졌습니다. 7장 마지막 절에 이어 8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 8:1). 사울은 목격자입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눈에 주님의 빛으로 말미암은 비늘 같은 것이 씌우고 벗겨지는 과정을 통해 제2의 스데반이 태어납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던 사울은 스데반의 고난을 마땅히 이어받는 사람이 됩니다.
스륵스륵. 내 인생이 갈릴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공들인 내 역할이 갈려서 사라지는 것뿐인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동양의 수묵화는 평면이 아닙니다. 입체입니다. 그림에 향기가 어우러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묵향(墨香)이라고 합니다. 묵향은 오로지 갈려서 화선지 위에 뿌려진 먹물에 의해서만 납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은은히 화선지 위로 피어오르는 묵향, 그 영광이 먹에게 있습니다. 갈려서 화선지 위에 향으로 남는 인생, 그 아니 멋지겠습니까.
기도
“하나님, 그저 갈려서 사라지는 먹과 같은 역할이라 할지라도, 묵향으로 승화하는 과정임을 알고 묵묵히 감당하는 영성을 주옵소서.”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7-05. QT큐티체조.
간단설명. 바울은 말과 지혜가 아닌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했다.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의지했다. 이는 성도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고자 함이다.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2:1-9
한글본문.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6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영어본문.
1 When I came to you, brothers, I did not come with eloquence or superior wisdom as I proclaimed to you the testimony about God. 2 For I resolved to know nothing while I was with you except Jesus Christ and him crucified. 3 I came to you in weakness and fear, and with much trembling. 4 My message and my preaching were not with wise and persuasive words, but with a demonstration of the Spirit’s power, 5 so that your faith might not rest on men’s wisdom, but on God’s power. 6 We do, however, speak a message of wisdom among the mature, but not the wisdom of this age or of the rulers of this age, who are coming to nothing. 7 No, we speak of God’s secret wisdom, a wisdom that has been hidden and that God destined for our glory before time began. 8 None of the rulers of this age understood it, for if they had, they would not have crucified the Lord of glory. 9 However, as it is written: “No eye has seen, no ear has heard, no mind has conceived what God has prepared for those who love him”–
도움말.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1절). 바울이 2차 선교여행 중에 고린도를 처음 방문한 일을 말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의 지혜에는 어떤 특성이 있는가(7절)?
⬇ 아래로 인간. 바울은 무엇만을 알기로 작정했는가(2절)?
? 물어봐. 참된 믿음은 무엇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가(5절)?
! 느껴봐. 나의 믿음은 그럴듯한 말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위에 세워져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믿음의 견고함을 이루기 위해서 점검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Meditation. 참 믿음의 공식, 십자가의 도
바울은 2차 선교여행 중 아덴에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사역하다 실패를 경험했다(행 17:16-34).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연이어 방문한 고린도에서는 다른 방식, 곧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사역했다(4절). 웅변과 설득적 수사학을 사용하지 않고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는 단순한 메시지 앞에서 오히려 아덴에서는 불가능했던 교회 공동체가 고린도에서 세워졌다.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는 현란한 수사학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온전히 드러난다(7절). 명석한 논리와 탁월한 언변에 의존하는 믿음은 그보다 더 우월한 논리와 언변에 허물어진다. 오직 투박하고 직설적인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진 믿음만이 하나님의 능력에 기초를 둔 난공불락의 믿음이다(5절).
하나님은 인간적 달변과 선동적 설교를 통해서 당신의 지혜와 능력을 전달하지 않으신다. 오직 직선적인 십자가 복음 선포를 통해 그 지혜와 능력을 공급하신다. 이것이 믿음의 공식이다. 당신은 이 공식을 지금도 견고히 붙들고 있는가? 날이 갈수록 더욱 사모하고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7-04. QT큐티체조.
간단설명. 하나님이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해야 한다.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26-31
한글본문.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영어본문. 26 Brothers, think of what you were when you were called. Not many of you were wise by human standards; not many were influential; not many were of noble birth. 27 But God chose the foolish things of the world to shame the wise; God chose the weak things of the world to shame the strong. 28 He chose the lowly things of this world and the despised things–and the things that are not–to nullify the things that are, 29 so that no one may boast before him. 30 It is because of him that you are in Christ Jesus, who has become for us wisdom from God–that is, our righteousness, holiness and redemption. 31 Therefore, as it is written: “Let him who boasts boast in the Lord.”
도움말.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30절). 네 단어를 단순하게 병렬적으로 열거한 것이 아니다.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은 맨 앞에 있는 지혜의 특성이다.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어떠한 역할을 하시는가(30b)?
⬇ 아래로 인간. 구원받은 성도의 영적 기원과 그 위치는 어디인가(30a)?
? 물어봐. 사람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에는 어떠한 특징이 있는가(27-28절)?
! 느껴봐. 나는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가? 그리고 주님을 자랑하는 일에 열심인가(31절)?
➡ 옆으로 실천해. 나의 자랑거리와 자랑의 방법에는 이제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겠는가?
Meditation. 올인원(all-in-one)이신 예수 그리스도
부르심과 택하심의 원리가 제시된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 천한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을 부르고 택하셔서 지혜 있는 사람들과 강한 사람들과 있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며 폐하려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사람의 육체적 조건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음(29절)을 반증한다. 사람의 재능과 신분과 지식 여부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것들은 구원의 기준과 기초가 아니다. 만일 구원이 그것들 위에 세워졌다면 부실공사나 다름 없다. 오직 하나님은 그 지혜로 구원을 완성하셨다. 그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 지혜는 붙드는 사람에게 의로움이 되어 하나님 앞에 우뚝 서게 하고, 거룩함이 되어 하나님께 성큼 나아가게 하며, 구원함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신명나게 누리게 한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만을 자랑해야 할 이유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30절) 온전한 구원과 영생의 장치가 완비되어 있다. 예수님은 올인원이시다. 당신은 모든 것이 되시는 주님 안에 견고히 서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4-07-03.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다. 세상의 지혜로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로 사람을 구원하신다. 그리고 구원받는 사람들에게 그 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18-25
한글본문.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영어본문.
18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19 For it is written: “I will destroy the wisdom of the wise; the intelligence of the intelligent I will frustrate.” 20 Where is the wise man? Where is the scholar? Where is the philosopher of this age? Has not God made foolish the wisdom of the world? 21 For since in the wisdom of God the world through its wisdom did not know him, God was pleased through the foolishness of what was preached to save those who believe. 22 Jews demand miraculous signs and Greeks look for wisdom, 23 but we preach Christ crucified: a stumbling block to Jews and foolishness to Gentiles, 24 but to those whom God has called, both Jews and Greeks, Christ the power of God and the wisdom of God. 25 For the foolishness of God is wiser than man’s wisdom, and the weakness of God is stronger than man’s strength.
도움말.
전도(21절). 헬라어 ‘케리그마’로서, 복음의 내용과 그 전달 방식 모두를 포괄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24절)?
⬇ 아래로 인간. 구원을 받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가(18절)?
? 물어봐.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신 방법은 무엇인가(21절)?
! 느껴봐. 나는 일상 속에서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십자가의 도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더욱 풍성히 체험하기 위해 삶 가운데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Meditation. 뒤집어진 가치와 십자가의 도
세상의 가치체계가 전복되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지혜와 미련한 것의 가치를 뒤집으셨다(20절). 전복된 가치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으로 치부되었다(18절). 게다가 유대인들은 십자가 대신에 표적 곧 기이한 현상을, 헬라인들은 지혜 곧 이성적 증거를 가져 오라고 요구했다. 왜곡된 세상의 가치체계 속에 십자가의 복음이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 그대로 연착륙할 수 없었다.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를 가져오기 위해 선택된 것은 ‘전도’라는 미련하게 보이는 방식이다(21절). 그러나 그 도를 붙드는 사람에게 구원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능력(18절)이 흘러든다. 그는 참된 지혜자로 거듭난다.
십자가에 대한 관점이 인생의 향방을 결정한다. 어떤 이에게는 함량 미달의 우스갯소리요, 어떤 이에게는 귀에 거슬리는 불쾌한 신화다. 당신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요, 구원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하는가? 그 십자가의 도를 견고히 붙들고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 채청호
간암 걸린 남편이 “나 여자 있어”라고 고백한다면?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 채정호 저자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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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8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은 ‘애도치유카페’로 변신했다. 최근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를 펴낸 채정호 교수가 카페 주인장으로 변신했다. ‘애도하는 사람이 건강하다’를 주제로 상실의 슬픔을 잘 떠나보내는 것에 대해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글 | 김이준수 사진 | 출판사 제공
최근 칸영화제에서 <스틸 더 워터>라는 신작을 선보인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2007년작 <너를 보내는 숲>. 이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별(상실)에 대처하는 자세’ 때문이었다. 느닷없는 이별 앞에,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던 이들이 주인공이다. 상실의 슬픔을 품은 이들은 눈물, 즉 ‘티어스테라피(tears therapy)’를 통해 이별을 감내한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 생(生)임을 받아들인다. 나는 이 영화를 이렇게 읽고 있었다. “이별은 만남만큼이나 중요하며, 이별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살아있음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작가만남-채정호
지난 5월 28일의 봄밤에는 그렇게 <너를 보내는 숲>이 떠올랐다. 이날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은 ‘애도치유카페’로 변신했다. 최근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를 펴낸 채정호 교수(가톨릭의대, 정신과 전문의)가 카페 주인장으로 변신했다. ‘애도하는 사람이 건강하다’를 주제로 상실의 슬픔을 잘 떠나보내는 것에 대해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여전한 세월호 정국. 이 집단적 슬픔 앞에 우리는 어떻게 견뎌나가야 할까.
감정에 충실하게 복무할 것.
“감정이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나에게 슬픔의 감정이 움직였다면, 어떻게든 그 감정에 귀 기울어주는 것이 옳다. 그래야 그 슬픔의 감정으로부터 내가 아프지 않을 수 있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161쪽)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이다. 그러나 한국인들,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희로애락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고 채 교수는 지적했다. 상대적으로 화내는 것은 잘 하나, 기쁠 때 이것을 잘 표현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즐거움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것도 서툴다.
“슬프면 슬퍼야 한다. 희로애락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평상 시 그런 것이 별로 없다. 4년에 한 번 월드컵 하면 기쁘고(웃음). 평상시 기분이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감성적임에도 기쁠 때 기뻐하지 않는다. 화날 때는 화내면 되는데, 화를 안 낸다. 그러다 나중에 지랄을 하고(웃음). 장례식 가서도 울어야 한다. 요즘 세월호 관련한 정신과 치료를 맡고 있는데, 제대로 울 수 있게끔 도와주고 있다. 울어야 할 때 울어야 한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슬픔의 감정을 섣불리 억누르지 말자. 감정이란 본능적인 것이다.(중략) 슬픔이란 감정은 한치의 오차가 없다. 슬픔의 대가를 일시불로 치르느냐 아니면 할부로 치르느냐, 그것이 다를 뿐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169쪽)
우리는 뭔가 잃고 상실했을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 배운 적이 없다. 대신 어떻게 하면 얻을 것인지만 배운다. 돈, 성적, 집, 승진 등이 그것이다. 계속 얻어야 하는 것만 주입받는다. 삶은 그러나 얻을 수만 없다. 얻으면 잃는 것이 사는 것이다. 우리는 상실하고 잃었을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채 교수의 이야길 들으면서 도정일 교수의 말씀이 떠올랐다. 도 교수는 상실의 시간과 화해하는 기술을 언급했다. “마흔 이후의 사람들이 훨씬 중후해 보이는 것은 잃어버린 것들의 무게 때문이다. 그 무게와 함께 사람들은 어떤 기술을 터득하기 시작한다. 가슴이 어떻게 상실의 시간과 화해하는가라는 기술이 그것이다.”
상실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상실의 의미).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이 상실의 순간을 결코 피해갈 순 없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행복했던 결혼생활도 언젠가는 끝난다. 사별이나 이혼, 이 둘 중 하나를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부부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일도 그렇다.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언젠가는 은퇴의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중략) 삶이란 잃어버리는 것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라는 의미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18쪽)
살다보면 안다. 견디기 어려운 상실은 갑자기 찾아온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온다. 세월호도 그랬다. 4월 16일 이전까지는 아무 일 없었다. 그러나 그날이후 아픔과 슬픔이 갑자기 닥쳤다. 전쟁도 그러하며 교통사고도 그렇다. 채 교수는 이별은 내가 원하지 않는 시점에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힘들어진다. 예고 없는 이별, 준비 없는 상실. 그렇기에 묻는다.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상실을 맞닥뜨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채 교수에 의하면, ‘애도(哀悼)’를 잘 해야 한다. 애도의 사전적 정의를 보자.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했을 때의 정신적 충격과 그에 따른 심리적 반응과 진행 과정. 즉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과 그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모든 것과 이별한다. 결혼의 끝은 무엇일까. 이혼이나 사별이다. 대언이 있나? 없다! 아들, 딸을 사랑해도 그 관계의 끝은 무엇일까. 내가 죽거나 아이가 죽거나. 물론 의절도 있겠지만. 모든 관계의 끝은 안 보거나 없어지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모든 것과 이별하는 것, 너무 두렵지. 굉장히 좋아하면 이별이나 상실이 굉장히 힘들어진다. 어떤 것도 아픔을 치유할 수 없다. 사실 치유나 힐링은 개소리다(웃음). 치유는 안 된다. 상담 받으면 치유가 된다고? 치유,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영화 <상실의 시대>에 나온 와타나베의 말을 인용했다. “나오코가 내게 가르쳐준 건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진정한 치유란 없었던 일처럼 상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상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나의 상처를 인정하고 그 다음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33쪽)
상실로 인한 심리적 문제들(상실의 상처).
그렇다면 상실로 인한 문제는 어떻게 풀면 좋을까. 채 교수는 자신과 상담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30년을 함께 산 남편이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간암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남편은 그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며, 남은 3개월 사랑하는 이와 살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것도 10년이나 된 사이. 아내는 묵묵하게 남편의 소원을 들어줬다. 그러나 남편이 죽고, 아내는 화병이 나서 채 교수를 찾아왔다.
“화병이 안 오면 이상한 거다. 부인이 쿨하게 장례까지 치르고 완전히 무너졌다. 다시 세우는데 7~8년이 걸렸다. 그만큼 치유가 안 된다. 자기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화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럴 땐 화를 내야 한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부인이 화 한 번 안 냈다. 상실이 있을 때 화가 나는 건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화가 계속 나는 건 문제다. 화가 계속 간다면 우울이다. 우울한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나 계속 가는 것은 나쁘다.”
“화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무조건 참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차별적으로 표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화의 감정은 정직하다. 따라서 화가 났다고 수치스럽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어떻게 반응할지가 더 중요하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79쪽)
그는 ‘망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감정을 눌러 놓으면 반드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기억해야 할 것을 눌러놓으면 어느 순간 생뚱맞게 튀어나온다. 너무 누르기 때문에 계속 가고 병이 된다. 이것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다. 불안 역시 상실 후 찾아올 수 있는 감정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전국은 지금 ‘범불안장애주의보’가 내린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화나 우울처럼 계속 가는 것은 문제다. 중독에 빠지는 이유다. 중독은 뭔가를 대체하기 위해서 온다는 것. 술을 많이 마시거나, 도박에 빠진다. 혹은 물건을 사는데 열중하는 쇼핑 중독에 빠진다. 아울러 충동적이 되거나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냉소적으로 빠지는 경우도 있다. 실연 뒤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해당된다.
“애도의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뤄지지 위해서는 과거의 삶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즉 과거의 상태를 버리는 것이 애도의 핵심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100쪽)
상실의 슬픔을 잘 떠나보내는 법(상실의 치유).
“동양철학에서는 애이불상(哀以不傷)이라 하여 슬퍼하되 마음이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건강한 슬픔이라고 말한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85쪽)
채 교수는 거듭 강조했다. 치유는 안 되나, 우리는 살아야 한다. 이에 잘 사는 방법 몇 가지를 제시했다. 우선, 잘 우는 것(눈물). 물론 계속 울어선 안 된다. 울 때 우는 것. 시도 때도 없이 우는 우울도 있는데, 이것은 우울증이라는 병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것이다. 적절하게 슬퍼하고 눈물 흘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신경을 써야 한다.
“나 스스로 슬픔의 통로를 만들고, 그곳으로 상실의 감정들을 흘려보내야 한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충분히 슬퍼하고 마음껏 우는 것이다. 나에게 슬퍼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하는 것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153쪽)
또 하나는 말, 즉 이야기다. 내 상태나 감정이 어떠한지 이야기할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왜 훌륭할까. 그는 어떤 개소리라도 진지하게 들었다. 그의 원칙은 이랬다. 진지하게, 공정하게. 우리는 진지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게 이야기한다.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잘 못한다. 진지하게 공정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다. 진지하게 공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딱 한 사람을 만들어라. 그게 없으면 돈을 내고 정신과에 오는 거다. 진지하고 공정하게 이야기를 들어줄 한 사람이 필요하다. 힘든 사람에겐 진지하고, 공정하게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진지하고 공정하게 이야기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상실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세 가지는 울기, 말하기, 시간이다. 정말 견디지 못할 정도면 치료를 받아도 된다는 것이 채 교수의 말이다. 상실의 슬픔이 병적으로 남아 있지 않는다면 치유과정에서 얻을 것만 얻으면서 시간과 함께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얻지 못하면 달라지지 못한다. 그러면 상처를 누르면 튀어 오르는 과정을 되풀이하게 된다.
“만약 누군가를 잃는다면 그 전의 나와 같은 사람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나다. 내가 아닌 게 아니다. 내가 잃어버린 전의 모습에 익숙해서 내가 아닌 것 같은데, 그 잃어버린 것도 나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없다고 정말 없는 걸까? 지금 없다고 그 사람과 살았던 시간이 없는 것일까? 치유와 회복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런 순간을 ‘딜리트(delete)’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내가 같이 있었던 사람은 내 안에 있다. 같이 있는 것이다.”
아무렴.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에는 상실을 잘 애도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온다. 국제자원봉사를 나갔다가 전염병에 걸려 죽은 딸. 어머니는 딸이 그렇게 원했던 국제자원봉사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다. 나도 살고 딸도 사는 방법을 택한다. 마크 롤랜즈의 『철학자와 늑대』가 떠올랐다.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형성하도록 도와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기억할 가치가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이 만들어 준 사람의 모습으로 사는 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그들을 존경하는 방법이다.”
채 교수는 상실과 이별을 내 삶의 사실로 받아들일 것을 거듭 강조했다. 그것은 순서적, 시간적 문제라는 것. 이별하면 끝이 아니다. 잃어버린 나도 내 삶이다.
“세월호 이후 내 자식이 살아 있어서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많이 아프다. 아프지 않으려고 하지 말자. 아파도 된다. 아픈 것만큼 기쁜 것도 누리고, 대체는 안 되지만, 다른 것에 기쁨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녀를 잃고 죄책감 등으로 부부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 자녀에 대한 이야기, 내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기 때문이다. 울고 싶으면 울고 말해야 한다. 시간도 필요하다.”
“상실의 문제에는 시간의 원칙이 적용된다. 물론 상실의 대상과 자신의 심리적 자원에 따라 애도 기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중략) 분명한 사실은 그 누구도 상실의 시간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나의 속도에 맞추어 애도의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것이 중요하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92쪽)
내 인생에 있었던 것을 ‘딜리트’ 키를 누른다고 없앨 수 없다. 라캉 왈, “애도는 산 자에게 욕망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즉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애도다. 그 중에 가장 사랑해야 하는 것이 나다. 자녀를 잃어버린 나, 남편을 잃어버린 나, 그런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게 애도다.
“치유는 안 되나, 안 돼도 괜찮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다. 30여년 정신과 의사로 있지만, 나도 어린 시절의 상처가 치유 안 되더라. 그래도 괜찮다. 꽤 괜찮다. 치유는 안 됐지만 나름대로 살 수 있다. 그러니 쫄지 마라. 그래도 살 수 있다. 병나지 않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내 모습이 괜찮을 수 있다. 내 삶이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울고, 때론 말하고, 때론 시간 보내고, 그러면 괜찮다.”
정신의학적으로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비워낼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콤플렉스도 있고, 어려움도 있고, 내가 비우고 싶고 지우고 싶은 덩어리가 있을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도 나다. 그 아픔이 없기를 원하는 거지. 딱 그 시간, 그 상처만 없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건 아니잖나. 그걸 도려내면 내 인생이 아니다. 나빠지지 말고 망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인생에서 지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지난 모든 것이 쌓인 것이 지금의 나다. 나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 지우려고 하지 말고 같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
“상처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또 소중한 사람을 잃고 슬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은 온전히 계속되어야 한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45쪽)
극소수지만, 이지선 씨는 엄청난 상실을 당하고 난 뒤 훌륭하게 승화를 했다. ‘외상 후 성장’이라는 표현도 쓰던데, 상실이나 상처가 삶의 새로운 전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나?
많은 연구들이 있는데, 힘든 일을 겪고 더 커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있긴 하나, 많지 않다. 열 명 중 한 명 정도다. 또 열 명 중 한 명은 병이 나고 망가진다. 나머지 여덟이 보통의 사람들이다. 자기 인생을 돌아보거나 조금 나아지거나 그냥 산다. 좀 더 큰 나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상시에 건강한 사람, 원래 자존감이 있는 사람이 좋아진다. 원래 어땠느냐가 중요하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트라우마나 충격에 따라 다르긴 하나, 대개는 삶의 목적이나 가치가 있는 사람들, 삶에 사랑의 흔적이 많은 사람들이 회복을 잘 한다. 우리 모두는 상실을 겪는다. 외상 후 성장을 하려면, 주변의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 살면 된다. 그러면 끔찍한 일을 겪어도 회복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정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가 살 길은 사랑하는 것이다. 치유는 안 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사랑해라.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낸 경험은 더없이 소중한 인생의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이란 다른 이와 관계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배워가는 일이 아닌가.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상처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상실은 그만큼 열렬히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흔적이다. 사랑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고마운 아픔이다.”(『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2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