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왜 주셨을까? 현대용어버전.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왜 주셨을까요? 오해는 이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나 율법이 부당한 게 아니라 지키지 못하는 우리 형편이 참혹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걸 모른다는 사실이고 율법이 하는 한 가지 기능은 바로 이 점을 각성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율법 자체가 정당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참혹한 처지로부터 벗어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소스코드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 소스코드는 ‘그리스도’이고 접속 암호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라는 소스코드에 접속하면 ‘은혜’가 다운로드됩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신자가 전에 죄에 매여 종노릇할 때는 지킬 수 없었던 율법을 지키게 하는 에너지이며, 우리 DNA에 감염된 바이러스 곧 ‘죄’를 퇴치하는 ‘백신’이며 하나님이 애시당초 약속하셨던 복과 풍요를 누리게 하는 솔루션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소스코드에 ‘믿음’이란 접속 암호로 접속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100 byte 수준 어떤 사람은 1 메가 또 다른 사람은 10 메가 혹은 100메가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속도저하의 직접적 원인은 재리와 일락등이 기운을 막거나 그리스도라는 소스코드에 접속했다기보다 처음부터 약간의 와이파이를 나눠쓰는 일반은총의 빛아래 있어서 환란이 닥치매 소스코드와 연결이 끊어져 결실치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부지런히 영적 디바이스 즉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해서 접속과 다운로드를 반복하지 않으면 누구도 승리할 수 없으며 율법은 지킬 수 없습니다. 현재 자신의 상태를 기준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없다는 논쟁은 그런 점에서 출발선상이 근본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루이스의 펫북에서>

2014-03-02. 주일에는 읽는 QT큐티. 일곱교회 이야기 5. 두아디라 교회.

간단설명. 믿음은 회개의 상태를 산출하면서 자기 자신을 입증한다. - 존 오웬

성경본문. 요한계시록 2:18-23
한글본문.
18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영어본문.
18 “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Thyatira write: These are the words of the Son of God, whose eyes are like blazing fire and whose feet are like burnished bronze. 19 I know your deeds, your love and faith, your service and perseverance, and that you are now doing more than you did at first. 20 Nevertheless, I have this against you: You tolerate that woman Jezebel, who calls herself a prophetess. By her teaching she misleads my servants into sexual immorality and the eating of food sacrificed to idols. 21 I have given her time to repent of her immorality, but she is unwilling. 22 So I will cast her on a bed of suffering, and I will make those who commit adultery with her suffer intensely, unless they repent of her ways. 23 I will strike her children dead. Then all the churches will know that I am he who searches hearts and minds, and I will repay each of you according to your deeds.

Meditation. 두아디라교회. 회개하고 돌이키라.
두아디라교회는 에베소교회와 아주 유사하게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라는 귀한 신앙적 덕목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주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에베소교회에 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고, 주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사랑과 믿음을 동력으로 하여 섬김과 인내의 삶을 살아낸 수준 있는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 속에서 우리는 존재(Being)와 사역(Doing)이 멋지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렇듯 아름답게 균형 잡힌 영성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결함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을 용납한 것입니다(20절). 교회를 교란하는 사악한 교사의 이름을 이세벨로 지칭하는 것은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을 심히도 괴롭혔던 악의 화신 이세벨을 또렷하게 생각나게 만듭니다. 아마도 이세벨로 불렸던 이 사람은 순수한 기독교 신앙을 로마 사회가 요구하는 우상을 섬기는 생활로 교묘하게 희석시켰던 것 같습니다. 로마의 혼탁한 문화와 정신에 기독교적 성결을 다치지 않고 타협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그럴듯한 거짓 주장은 많은 성도를 타락의 길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미혹하는 이세벨과 그 추종자들에게는 무서운 형벌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임하게 되는 형벌은 단순히 죄와 관련이 있기보다는 회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그 회개하지 않는 죄에 대해 최종적인 심판을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21-22절). 이러한 모습은 요한계시록이 힘주어 강조하는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은 오래 참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패역에 대해 답답하리만큼 인내하며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정한 때까지만 기다리십니다. 주님의 인내를 악용하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고난의 침상에 던져지는 형벌이 주어질 것입니다(22절). 주님이 이세벨에게 오래 참으셨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더 인내하실까요? 그 분의 오래 참고 기다리심에 감사를 드리며, 또 다시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주님 앞에 돌이키는 삶을 사는 하루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저를 향하신 인내를 악용하지 않고 늘 깨어 돌이키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메시지의 성경적 균형을 위해 도움이 되는 글’의 이해를 돕는 글. 5-2

장기영|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학부(신학과, 1994년 졸업)와, M.Div.(1996), Th.M.(1999) 과정을 졸업 후, 5년간 군목으로 사역하였으며, 전역 후 미국의 Asbury Theological Seminary(M.A., 2006)와 영국의 The University of Manchester(Ph.D., 2012)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였다. 현재는 서울신학대학교와 평택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 글은 저자의 동의하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월간지 ‘활천’에 연재되고 있는 글을 가져왔습니다. ‘메시지의 성경적 균형을 위해 도움되는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합니다.>

한없는 사랑에 감동을 받고,
자유의지에 대하여.

지난호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노예의지론을 알아보았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마귀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죄를 벗어나거나 선을 택할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마귀를 내쫓고 그 의지를 다스리시면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피동적으로 믿음과 경건한 삶을 살게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듯 보이는 믿음이나 선행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생각할 때에라야, 인간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 교단 헌법 제2장 제16조는 존 웨슬리의 신학적 입장을 따라“의지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면 이는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주장처럼 공로사상이나 율법주의의 문을 열어놓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즉 모든 것을 아시고, 한 마리 새의 움직임까지, 즉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인데(마 10:29-30),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완벽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작은 균열이라도 만들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결국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인하는 것 아닐까요? 웨슬리는 이런 위험성을 몰랐을까요?

이런 문제들에 직접적으로 답하기보다 먼저 성결가족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의지가 말[馬]이라면 하나님은 그 위에 올라탄 기수라는 설명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 느껴지시는지요?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교도소의 교도관과 죄수, 유격장의 조교와 훈련병, 혹은 스파르타식 입시학원의 강사와 학생의 관계같이 통제와 순응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으시는지요? 만약 부모가 자식과의 관계를 이렇게 전적인 통제와 순응으로 설정을 한다면, 저로서는 그 엄격함과 답답함을 견딜 수 없어 가출이라도 했을지 모릅니다. 비록 부모다움, 교사다움, 심지어 하나님다움에 자녀, 학생, 인간에 대한 통제와 권위의 행사가 포함된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그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표현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전지전능하심을 부인하려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하나님 수준으로 높이거나, 하나님을 인간 수준으로 낮추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주권자로서 영원히 예배와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찬양하면서도, 다만 하나님께서 주권과 전지전능하심을 나타내시는‘방법’에 웨슬리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신 아담을 축복하셨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능력에 따라 점점 많은 자유를 허용하고 책임도 맡기듯,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주신 지혜와 능력에 부합하도록 하나님의 통치 영역 일부를 맡기셔서 자연세계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창 1:26-28). 하나님께서 만드신 생물의 이름 짓는 일을 아담이 담당한 것은, 아담이 허락받은 영역 속에서 행사할 자유와 권세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존중하시고 인정하신 것을 의미합니다(창 2:19). 즉,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을 허락하신 영역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직접적 권세를 사용하시기보다는 스스로 뒤로 물러나 그저 지켜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시면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하심이 훼손될까요?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하심을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라는 지침 – 가령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 – 그리고 그 지침을 어길 시에 내려질 형벌을 통해 여전히 행사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불순종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거역을 당하고, 주권이 무시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적 주권은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들을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이키시는 데서 드러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통제하거나 압도하는 방법으로 인간을 다루시기보다는, 인간의 자유를 여전히 존중하는 가운데 그의 사랑과 공의, 선하심과 지혜 등을 모두 동원하여 아주 인격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설득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기 의지가 꺾여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에 감동을 받고 그 끈질긴 설득에 항복하여, 하나님께서 강제하시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의 품을 찾아 안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느끼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어린 자녀가 어머니의 수고를 다 알지 못해도 어머니는 아이를 탓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 차곡차곡 쌓여진 사랑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어머니께 대한 성숙한 감사로, 또 언젠가는 연약해진 어머니를 위한 수고와 섬김으로 나타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무시당하는 것 같고 주권이 훼손당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같이”강한 힘으로(아 8:6)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어, 자기중심적이고 반역적인 교만을 감사와 순종과 겸손으로 바꿉니다(고전 13:4-7). 결국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기를 자처할 정도가 됩니다. 사랑보다 강한 힘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이렇듯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두면서도 그 마음을 감동시켜 변화시키는 사랑의 전능하심이지, 강제를 통한 전능하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임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메시지의 성경적 균형을 위해 도움이 되는 글’의 이해를 돕는 글. 5-1

[자유의지와 노예의지1]

‘노예의지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장기영|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학부(신학과, 1994년 졸업)와, M.Div.(1996), Th.M.(1999) 과정을 졸업 후, 5년간 군목으로 사역하였으며, 전역 후 미국의 Asbury Theological Seminary(M.A., 2006)와 영국의 The University of Manchester(Ph.D., 2012)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였다. 현재는 서울신학대학교와 평택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 글은 저자의 동의하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월간지 ‘활천’에 연재되고 있는 글을 가져왔습니다. ‘메시지의 성경적 균형을 위해 도움되는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합니다.>

성결가족 여러분, 노예의지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마 처음 듣는 분이 많으실 것 같아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라 신학용어인 데다, 다른 교단 신학교에서 주로 가르치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저도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한 지 몇 해가 지나 처음 이 말을 접하고는 무척 생소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노예의지가 뭐지? 노예근성? 노예들만의 특성?’

노예의지가 자유의지와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렇다면 사람이 그저 꼭두각시라는 것이야?’하는 모종의 반발심과 함께, 누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궁금하여 자료를 찾아 읽고 함축된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되면서, 저는 혹 자유의지를 가르쳐온 우리 교단의 신학보다 오히려 노예의지가 성경적 가르침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그 논리에 깊이 설득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성결교회를 다녔고 신학교에서도 자유의지를 배운 저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먼저, 노예의지를 가르친 분들은 성 어거스틴이나 마틴 루터, 존 칼빈 등 기라성 같은 교회 지도자들이자 신학의 대가들이었습니다. 성경을 모르거나 사고력이 부족하거
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구절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 논리적으로 주장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들의 영적 권위와 경건한 목적의식은 순수하고도 강력해서, 어쩌면 노예의지를 반대하는 것은 은혜와 영광의 하나님께 반기를 드는 것이라는 두려움마저 갖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노예의지란 무엇일까요?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크게 동식물과 사람이 사는 눈에 보이는 세상과, 하나님과 천사들, 마귀와 귀신들이 활동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영향을 받고, 사람은 하나님과 마귀의 영향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노예의지론의 핵심입니다. 물론 영적 세계가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우리 교단도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그 영향이 어느 정도까지인가’에서 자유의지론과 노예의지론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마틴 루터의 설명을 한번 들어보세요.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서 있는 짐승과 같다. 만약 하나님이 그 위에 올라타신다면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원하고 행할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올라탄다면 인간의 의지는 사탄이 원하는 바를 원하고 행할 것이다. 누가 올라탈지를 인간이 선택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과 사탄이 인간의 의지를 지배하기 위해 싸운다.”

타락한 이후 인간은 스스로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탄이 죄인들의 의지를 지배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그 지배를 벗어날 능력이 없습니다. 누군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거룩한 삶을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을 내쫓고 그 사람을 전리품으로 획득하여 그의 의지를 지배하셨기에 가능합니다. 믿음과 거룩한 삶은 노예의지에 의해 피동적으로 되는 것이지, 자유의지를 통해 능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노예의지를 주장하는 것일까요? 결과적으로 그들의 주장이 성경적인지는 꼭 점검해야하겠지만, 먼저 그들의 의도부터 살펴보면, 그들은 인간의 오랜 고질병과도 같은 습성, 즉 나쁜 일에 대해서는 늘 하나님께 화살을 돌리면서 좋은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신에게로 돌리는 교만과 배은망덕, 간사함을 꺾어버리려는 것입니다. 회개도, 믿음도, 거룩한 삶도 우리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못박아버릴 때, 어떤 일에서든 하나님 영광을 도둑질하려고 방법을 찾는 하이에나 같은 우리의 습성은 좌절되고, 영광은 고스란히 하나님께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부정은 인간의 자부심, 인간의 자기 우상화, 인간의 마귀화를 막는 그들의 비장의 무기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과 거룩한 삶의 근원에 관하여“오직 은총으로”라는 말을“오직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사람의 의지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구원의 수단으로서“오직 믿음”을 해석할 때에도 믿음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사람이 믿음을 갖는 데 있어서도 신적 결정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구원과 거룩한 삶의
여부는 100% 믿음을 주실 것인지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여 어거스틴과 루터, 칼빈에게서 노예의지는 예정론과도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런 노예의지론이 인간의 책임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과 양립할 수 있을까요? 노예의지론에 따르면, 구원의 영광만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불신과 멸망까지 하나님께로 그 원인이 돌려지는 것이 아닐까요? 성경은 과연 신적 결정론만 가르치면서 인간의 의지는 아무런 선택 능력이 없는 것으로 묘사할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우리 교단 신학(기독교대한성결교회/웨슬리안)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 헌법 제2장 제16조는 “의지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자유의지는 무엇을 가르치는지 다음호를 기대해주세요.

2014-03-01. QT큐티체조. 대한 독립 만세!

간단설명. 사두개인들이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 사로잡혀 있음을 밝히신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2:18-27
한글본문.
18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영어본문.
18 Then the Sadducees, who say there is no resurrection, came to him with a question. 19 “Teacher,” they said, “Moses wrote for us that if a man’s brother dies and leaves a wife but no children, the man must marry the widow and have children for his brother. 20 Now there were seven brothers. The first one married and died without leaving any children. 21 The second one married the widow, but he also died, leaving no child. It was the same with the third. 22 In fact, none of the seven left any children. Last of all, the woman died too. 23 At the resurrection whose wife will she be, since the seven were married to her?” 24 Jesus replied, “Are you not in error because you do not know the Scriptures or the power of God? 25 When the dead rise, they will neither marry nor be given in marriage; they will be like the angels in heaven. 26 Now about the dead rising–have you not read in the book of Moses, in the account of the bush, how God said to him, ‘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27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You are badly mistaken!”

간단설명.
사두개인(18절). 내세와 부활, 영의 세계,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현세적인 유대주의 종파 중 하나다.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26-27절)?
⬇ 아래로 인간. 사두개인들의 오해와 곡해의 근본적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24절)?
? 물어봐. 부활한 사람은 어떤 존재와 같이 되는가(25절)?
! 느껴봐. 나는 신앙생활 중에 생겨나는 여러 가지 오해와 불신을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이해 속에서 해소하는가?
➡ 옆으로 실천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대가는 무엇인가?

Meditation. 우문현답 속에 드러난 하늘의 비밀
올무와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악의적인 질문이 예수님께 주어진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의 ‘형사취수법’(신 25:5-6)을 빌미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악의적이고 어리석은 질문을 되받아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더욱 선명하고 풍성한 진리를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사람은 부활 이후에 천사와 같이 된다고 가르치신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오해와 불신앙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통렬히 밝히신다.
신앙생활 중에 여러 가지 오해와 의혹들이 생겨나고 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붙들지 못하는 것은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공허한 사색과 논쟁에만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알면 풀리지 않는 믿음의 난제란 없다. 당신은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가? 이성과 상식으로 풀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의 능력과 신비 안에서 용납하고 있는가?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2012-02-28. QT큐티체조.

간단설명. 예수님은 자신을 책잡기 위해서 세금에 대해 묻는 사람에게 가이사의 형상이 있는 데나리온을 보이라고 하시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2:13-17
한글본문.
13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15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영어본문.
13 Later they sent some of the Pharisees and Herodians to Jesus to catch him in his words. 14 They came to him and said, “Teacher, we know you are a man of integrity. You aren’t swayed by men, because you pay no attention to who they are; but you teach the way of God in accordance with the truth. Is it right to pay taxes to Caesar or not? 15 Should we pay or shouldn’t we?” But Jesus knew their hypocrisy. “Why are you trying to trap me?” he asked. “Bring me a denarius and let me look at it.” 16 They brought the coin, and he asked them, “Whose portrait is this? And whose inscription?” “Caesar’s,” they replied. 17 Then Jesus said to them, “Give to Caesar what is Caesar’s and to God what is God’s.” And they were amazed at him.

도움말.
데나리온(15절). 로마 황제 가이사의 화상과 그의 신적통치를 표현하는 글이 새겨져 있는 은전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17절). 이 표현 가운데 헬라어 ‘카이’라는 접속사가 번역에서 생략되었다. ‘카이’는 순접(그리고)과 역접(그러나)의 의미를 다 포함해 문맥에 의해 번역해야 하는데, 본 구절에서는 ‘그러나’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15절)?
⬇ 아래로 인간. 예수님을 책잡으러 온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은 결국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17절)?
? 물어봐. 하나님의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17절)?
! 느껴봐. 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말씀을 가진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하나님의 것으로 온전히 드려지고 쓰임 받기 위해 어떠한 부분에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겠는가?

Meditation,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세금에 대한 논쟁 기사는 예수님의 대사회적, 정치적 입장을 단적으로 표명해 준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17절)는 이 언명은 자신을 책잡으려는 질문의 의도를 피하기 위한 수사학적 답변만이 아니다. 이 대답은 세속 국가인 가이사의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나라의 우월성과 유일성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두 구문 사이에 번역이 생략된 카이(그러나)라는 접속사를 함께 읽어야 한다. 곧 ‘가이사의 화상과 글이 있는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 주어라.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말씀을 받은 너희의 삶 전부는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이다. 마가는 전체 문맥 속에서 하나님 나라 주권의 절대성을 놓치지 않고 있다.
당신에게도 하나님의 형상과 말씀이 주어졌다. 당신은 하나님의 것이다. 당신의 시간과 재정과 재능과 관계는 지금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는가?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기 위해 변화되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영적인 기독교인의 심각한 우울증?

최근 유명한 한 목사의 죽음이 심장마비가 아니라 자살이었다는 기사가 떴다. 그는 심각한 우울증 환자였고 연이은 자살 시도 끝에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만일 사실이라면 일반인도 해서는 안 될 자살을 목사가 왜 선택했을까? 그는 성령 충만하지 않았던 것일까? 개인적으로 그분 설교를 들어본 적도 없지만 정직하고 개혁적인 분이라는 소문만 들었다. 심각한 우울증은 정신의 병일 뿐일까? 신앙의 차원은 아무 도움이 될 수 없을까?

이 이야기는 필자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이십여 년 전 가까이 지내던 한 여집사가 자살했다. 개인의 죽음으로 한 가정이 파탄 났다. 남편의 사업은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엄마가 사라진 어린 자녀를 제대로 보살피며 키우기엔 젊은 남편의 삶은 견딜 수 없는 지옥이었을 것이다.

여집사는 성품이 모질지 못하고 오로지 신앙으로 산 사람이었다. 대형 교회의 집사로 구역장으로 항상 솔선수범이었다. 목회자를 섬기는 면에서 언제나 정성을 기울였고 새벽 기도, 거의 매일 있는 철야 예배, 모든 집회에 빠짐없이 출석했다. 당시 사업하던 남편이 매달 건네준 큰 액수의 생활비가 항상 크게 모자랄 정도로 교회 봉헌을 열심히 하였다. 자신은 물론 아이들 옷 한 벌 제대로 사지도 않으면서 봉헌했다.

여집사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어느 날 평생 입에도 대지 않던 맥주를 두 병이나 마시고 농약을 마셨다. 여집사에게서 가장 많은 물질적 혜택을 본 그 교회 부목사가 장례식장에 왔다. 그리고 자살은 죄며 그녀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천국엔 갈 수 없노라고 했다. 당시 외국에 살던 필자는 그 소리를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미친 것 아냐! “수십 년 전에는 그렇게 믿던 목회자들이 뜻밖에 많았다. 아니 신앙인뿐만 아니라 일반인 중에도 미신적인 사고가 보편적이어서 우울증은 귀신 소행, 자살은 마귀의 행위라고 믿은 이들이 다수였다. 사실 대부분 우울증이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지금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서처럼 말이다. 지금은 그 목회자를 탓하고 싶지 않다. 그분도 일정 부분 희생자다. 신학의 빈곤으로 생긴 일이기 때문에 탓하자면 끝이 없다.

심각한 우울증이 원인인 자살은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수 세기 전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한 이의 장례식장에서 관을 두드리며 유족들 앞에서 “뜨거운 불 가운데 잘 타고 있는가”하고 호통치던 유명한 목사가 있었다. 차마 이름을 밝히지 않겠으나 우리에게도 아주 잘 알려진 서양 부흥사다.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확신 있는 복음 전도자의 성령 충만한 행위인 양 여겼지만 그런 방식은 사실 성경적이지 않다. 지금이야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근본주의자들이 지배하던 당시에는 이런 행태를 확신 있는 신앙으로 보았다. 우리 사회에도 아직 이런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이럴 때는 성경을 신학 서적이 아니라 목회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니 신학적으로 왈가불가한들 바뀔 것이 없다. 이미 자살한 분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고 있는 유가족들에게 신학적 입장이 아니라 목회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전하는 것이 하나님 뜻일 것이다.

필자는 그 여집사가 신앙이 잘못되어 자살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올바른 선택을 하기에는 이미 자기 의지에 의한 감정 조절이 불가능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변에서 도움을 주지 못했던 가족과 교회가 안타깝다. 이럴 때 치명적인 실수는 목회자가 환자에게 신앙으로 고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님만이 아니시다. 만유의 주님은 좋은 의사를 통해서 병을 고쳐 주시기도 한다. 우울증 환자에게 병원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렇다고 병원에 가면 곧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유전적 우울증인 경우 병원 치료를 통한 완치율은 30% 미만이라고 한다. 유전적인 우울증은 후천적으로 관리는 할 수 있어도 지금의 현대 의학으로 고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유전적 우울증은 불치병이라 부를 정도로 재발률이 몹시 높다. 그래서 다수 환자는 더 악화하지 않게 전문의의 도움을 받으며 우울한 자기를 보살피면서 평생 함께 살아가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주변에 주기적인 우울증에 시달리며 신앙으로 극복해 보고자 애를 쓰는 기독교인들을 본다. 안타깝게도 신앙으로 극복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크게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신앙은 의료적 도움과 병행할 때 확실하게 큰 도움이 된다. 가벼운 우울 증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 긍정의 힘을 주장하는 산술적인 책이나 강사들을 추종하여 교회에서도 이를 신앙으로 둔갑시켜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가 만든 귀신에 속고 있는 것이다.

의식적인 긍정적인 사고로 우울한 감정을 극복할 수 있을까?

보통의 우울한 감정은 부정적인 생각에서 온다. 감정이 일어나기 전 생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생각이 바뀌면 감정도 바뀐다. 그런데 생각은 무의식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무의식은 지금까지 알려진바 최소 95% 이상 인간의 의식을 조종한다. 즉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실천하고자 해도 생활에 적용하기 어려운 이유다. 초등학교 학생과 전문 격투기 선수와의 싸움처럼 언제나 의식보다 무의식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 의식적인 좋은 생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해도 곧 오래된 부정적인 생각의 습관이 나를 지배하기 쉽다. 다시 말하거니와 건강한 사람도 잠시 겪는 지나가는 우울증 이야기가 아니다. 무의식과 뇌가 이미 강하게 우울증에 노출된 경우 의학적 도움 없이 이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높은 영성으로 자신의 부정적인 무의식을 정화하고 승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고도로 훈련된 영성가의 경우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완치는 힘들어도 우울증을 잘 다스릴 수만 있다면 유익한 면도 있다. 첫째, 우울증을 겪는 이는 자신이 정신적 고통을 당하다 보니 남의 아픔을 잘 이해해 준다. 둘째, 우울한 감정이 예술과 문학적 감성의 에너지로 변화되기도 한다. 우울감은 창조의 에너지다. 셋째, 인간의 연약함을 깊게 인식하고 신앙에 의지하게 한다.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몸부림을 통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기도 한다.

정신착란(schizophrenia)이 아닌 노이로제(Neurosis)의 일종인 우울증은 감기같이 흔한 질병이다. 영국 스펄전 목사도 옥한흠 목사도 헨리 나우엔도 우울한 성향이 강한 분들이었다. 유명한 설교자나 기독교 작가 중엔 우울증이 기본인 분들이 많다. 감수성이 예민해서 그런가? 우울함이 신앙으로 잘 승화하면서 오히려 좋은 설교와 글이 나왔던 경우다. 그러나 문제는 심한 우울증의 경우다.

“심한 우울증이 아니에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독교인이니까요. 나는 성령 충만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죠. 물론 마음이 약해질 때도 때론 있지만, 항상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며 하나님만 바라보거든요. 내가 어떻게 심한 우울증일 수가 있어요? 난 아니거든요!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착각하지 마세요!”

“…”

“그런데 왜 내 마음은 이리 외롭고 우울한 거야. 모든 것이 짜증 나! 하나님은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시는 거야? 난 알고 있어. 다 성령 충만하지 못해서 그런 거야! 난 성령 충만해야 해! 마음에 위로를 주는 설교와 글, 집회를 찾아봐야지.”

이런 심각한 경우는 뜻밖에 목회자들 사이에 더 자주 발견된다. 우울증을 벗어나기 위해 교회를 위해 더 많이 헌신하고 더 많이 기도하고 찬양하고 몸부림친다. 문제는 그들이 그럴수록 더 큰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느낌, 사실 사소한 일인데도 감정이 더 상하고 낙심되는 느낌! 그리고 이 화의 감정은 자신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죄책감! “목회자로서 내가 이래야만 하는데 지금 나는 어떠한가?” 결국, 감정에 삶의 에너지가 다 낭비되어 하루를 시작할 힘도 없어진다.

문제는 기독교인이 깊은 우울함에 빠질 때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많이들 “성령 충만한 기독교인은 우울증에 대해 더 잘 다룰 수 있다!”고 착각한다. 이는 우울증에 빠진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현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우울증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다(빠져나올 수 있다면 심각한 우울증이 아니다!). 왜냐하면, 스트레스와 위기의 느낌에 관한 생물학적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뇌 기능의 한도가 넘어선 상태이기 때문이다(Kramer, p.131). 즉, 감정을 다스리는 뇌 부분의 기능이 감소한 경우에 개인의 의지가 감정에 함몰되기 때문이다. 심각한 우울증의 원인은 뇌 화학물질의 균형이 깨졌을 때 발생한다. 이런 경우 누구나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는 말이다.

환경적인 심한 충격도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아니다. 환경이 나빠서 모두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유전적인 요소가 오히려 개인의 반복되는 우울증에 가장 큰 요소다. 유전적으로 우울증에 강한 사람은 우울감에서 상대적으로 빨리 회복한다. 우울증에 덜 걸린다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건 조상 덕분이란 말이다. 이것은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성령 충만한 영적인 목사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중생했으니까 나는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서 우울증을 벗어나게 되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왼발 가려운데 오른발 긁는 꼴이다.

가벼운 우울증이나 우울증 예방에는 신앙생활이 확실히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심각한 우울증은 이미 신앙으로 치료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 상태다. 스스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전문 치료가 필요한 중병 환자에게 음식 조절하고 잘 쉬면 치료되고 정기적인 운동으로 병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수록 육체적으로 노화가 진행되고 질병에 취약해진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한다. 감정을 주관하는 뇌는 육체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기독교인 중에는 생물학적인 이유로 임상적인 우울증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유전적 병은 육체적 질병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우울증은 “믿음의 부족” 혹은 “나쁜 태도”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우울증을 겪는 이들은 주변의 배려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다 믿음 생활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꼭 정말 신앙심이나 선한 양심이 털끝만치도 없는 이들 중에 우울증과 거리가 먼 사람도 많지 않은가? 아픈 사람에게 질책은 금물이다.

우울증은 마음과 몸의 상태에서…마음과 몸은 긴밀하게 연결

첫째, 짧은 시간의 우울증은 때론 단순히 축적된 피로와 힘든 상황의 결과다. 왕상 19장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홀로 삼백여 명의 바알 선지자들과의 힘든 싸움에서 이긴 후 심하게 탈진했다. 그런데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그는 피로에 지친 상태에서 도망가야만 했다. 결국 그는 우울감에 빠져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끝내 달라고 소리친다. 그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그에게 음식을 공급하고 잠을 자게 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회복된다. 주변에 충분히 잠을 잘 수가 없고 학업이나 생활고에 지쳐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한국 사회에서는 대부분 수면 부족에 시달린다. 우선 생활이 힘들더라도 정신적으로 힘든 짐은 그리스도에게 다 맡기고 정신적인 쉼을 얻어야 한다.

둘째, 가벼운 우울증은 건강한 음식 섭취와 정기적인 운동으로 예방할 수 있다. 음식과 운동도 우리의 감정적이고 영적인 상태에 영향을 준다. 온갖 가공되고, 포화 지방이 넘치는 음식, 패스트푸드를 섭취하면서 운동은 멀리할 때 우울감은 당연하다. 건강한 음식 섭취를 하고 정기적인 운동을 할 때 상당수의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즐겁고 행복한 감정을 누릴 것이다. 우울할 때 끌리는 초콜릿에 빠지지 말고 평소에 영적인 생활을 즐겨라. 우울감을 막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인간은 원래 육체적으로 노동하고 영적인 존재이기에 하나님을 찾도록 창조되었다. 정기적인 기도와 찬양, 예배를 드리는 삶은 분명히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에 도움을 준다.

셋째, 우울증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몸의 화학적인 불균형으로 오기도 한다. 특히 유전적인 경우도 많고 여성들이 갱년기 때 겪은 우울증은 사실 육체적인 문제다. 규칙적인 유산소 운동과 근육 증가 운동이 도움되는 것은 틀림없다.

넷째, 우울증은 개인을 넘어 사회의 문제다. 오늘날 탐욕과 소비를 부추키며 항상 경쟁을 시키는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소진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요즘 남녀 간의 사랑은 지나치게 자본주의적인 이해관계다. 예전보다 남자는 돈, 여자는 미모면 다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 많은 젊은이에게조차 진실한 사랑이란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런 사회에서 서로 상처받고 상처 주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예전부터 백의의 천사로 불리던 간호사들의 현실은 지금 과도한 업무 그 자체다. 그래서 힘들게 대학에서 공부하고도 4년 내 이직률이 가장 높은 직업 중의 하나다. 병원에서도 중요한 것은 ‘돈’이다. 비용 절감 때문에 결국 업무 스트레스는 계속 높아진다. 적성에 맞지 않거나 비인간적인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것 모두 우울증을 유발한다. 충분하게 쉴 수 있는 휴가가 필요함에도 그러지 못하는 직장,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는 수많은 젊은이가 겪는 우울증은 사회적 문제다. 돈 때문에 형식적으로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수없이 외쳐야 하는 감정 노동자들, 빈익빈 부익부를 벗어날 수 없는 희망없는 미래가 사람들을 우울하게 한다. 우울증을 감소시키려면 사회가 변화되어야 한다.

다섯째, 우울증은 영적인 문제일 수 있다. 하나님 뜻에 맞지 않게 살았다는 죄책감은 우울증을 유발한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자신과 남을 해친다. 특히 기독교인 중에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복음은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도구가 아님에도 성경을 잘못 읽어서 발생하기도 한다. 또한, 일부 목회자들은 죄책감을 심어 주는 율법적인 말씀은 잘 전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복음을 전하는 데는 서툴다. 예를 들어 기독교 청소년 중에는 성적 정체성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동성애 성향이 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자살을 생각한다. 많은 교회에서 그 고통을 이해해 주고 상한 마음에 위로를 주고 하나님의 은혜로 벗어날 길을 제시해 주기보다는 말도 못 꺼낼 정도로 심하게 정죄만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하나님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여섯째, 유전적인 우울증의 잠재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또한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겪는다고 누구나 깊은 우울증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생각도 습관이고 생각에서 감정이 발생한다. 평소에 늘 감사하고 현재 상황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성서적인 세계관이 무의식까지 침투되어 있기란 어렵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 감정도 바뀐다. 관점이 체득되어 있고 기도의 힘이 축적된 사람은 사실 우울한 기질을 가지고 있거나 또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쉽게 우울해지지 않는다. 우울함에 빠져도 놀라울 정도로 빨리 빠져나온다. 운동을 통해 근육을 강화하듯이 오랜 기간 영성 훈련을 통해 마음의 근육을 강하게 훈련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서로 보살피는 양육 관계(보살핌을 받는 것 이상 보살피는 기회도 크나큰 기쁨이다), 말씀 묵상과 기도, 성경의 영성 훈련은 영혼의 보약이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깊은 우울증에 빠지기 전에 해야 하는 예방이다. 그러기에 이미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모두에게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필자의 경험으로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목회자의 지도 아래 오랜 훈련을 통해 영적인 관점이 체득될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모두 관리 가능한 우울증의 경우다.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조절이 안 될 때는 더 심해지기 전에 무조건 전문 병원에 가라! 이런저런 주변의 말을 믿지 말고 전공의의 말을 신뢰하라. 현재 우울증 치료는 예전보다 상당히 발전했다. 가까운 곳에 경험이 많은 전문 상담가 혹은 정신 건강 전문 인력을 찾아가야 한다. 병이 있으면 그 분야의 좋은 의사를 만나야만 치료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상담과 의료계에서 그 분야에 검증된 전문가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찾아야만 한다.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어떤 상담가와 의사를 만나느냐가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소문이나 인터넷 광고, 언론에 속지 말아야 한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 전문가를 만나 치료를 받는 것은 뜻밖에 쉽지 않은 일이다. 제삼자가 볼 때는 당연한 일임에도 심하게 우울증을 겪는 이에게는 전공자를 찾아 나서는 것이 보통 지독하게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먼저 우울증이 있을 때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 상담가나 의사를 만나길 원한다면 그쪽의 최고 전문가를 찾는 길을 여러 전문가를 통해 모색해야 한다.

둘째, 상담가나 의사를 만나면 정직해야 한다. 그들은 점쟁이가 아니다. 말을 안 하고 보여 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들은 도우려고 있지 정죄하거나 판단하려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더 많이 자신의 속마음을 개방할수록 더 많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끝으로 ‘목회는 목사에게, 질병은 의사에게’라고 말하고 싶다. 교회에서 목회자가 우울증 환자를 상담하고 도움을 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심각한 정신병에 대하여 목회자로서 해 줄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다. 목회자가 개입할 부분과 전문의에게 맡겨야 할 부분이 있다. 아니면 목회자는 탈진될 정도로 에너지만 소진하고 가족들에게 원망을 사고 상처만 남겨 원수가 되기 쉽다. 필자의 신앙 친구인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기립 원장의 말처럼 “우울증을 생물학적 질병으로 이해하는 과학적 관점이 한국의 교계에는 아직 많이 결핍되어 있다, 의지가 부족해서 또는 믿음이 부족해서 우울증에 걸리는 거 아니냐는 식이다.” 이 사고를 벗어나는 길이 환자를 돕는 길이다. 우울증!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 NES N JOY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