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21. QT큐티체조. 고린도 후서 시작합니다.

간단설명.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환난 중에 성도를 위로하시는 분임을 밝히고, 그 가운데서 받는 위로로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신다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으로 실증한다.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1:1-11
한글본문.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영어본문.
1 Paul,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the will of God, and Timothy our brother, To the church of God in Corinth, together with all the saints throughout Achaia: 2 Grace and peace to you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3 Praise be to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the Father of compassion and the God of all comfort, 4 who comforts us in all our troubles, so that we can comfort those in any trouble with the comfort we ourselves have received from God. 5 For just as the sufferings of Christ flow over into our lives, so also through Christ our comfort overflows. 6 If we are distressed, it is for your comfort and salvation; if we are comforted, it is for your comfort, which produces in you patient endurance of the same sufferings we suffer. 7 And our hope for you is firm, because we know that just as you share in our sufferings, so also you share in our comfort. 8 We do not want you to be uninformed, brothers, about the hardships we suffered in the province of Asia. We were under great pressure, far beyond our ability to endure, so that we despaired even of life. 9 Indeed, in our hearts we felt the sentence of death. But this happened that we might not rely on ourselves but on God, who raises the dead. 10 He has delivered us from such a deadly peril, and he will deliver us. On him we have set our hope that he will continue to deliver us, 11 as you help us by your prayers. Then many will give thanks on our behalf for the gracious favor granted us in answer to the prayers of many.

도움말.
위로(3절 등). 본 단락에서 열 번 쓰였으며, 위안이라기보다 격려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고난 중에 인내하는(7절) 과정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시사한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3-4절)?
⬇ 아래로 인간.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을 겪을 때 동일하게 그리스도로 인해 얻는 것은 무엇인가(5절)?
? 물어봐. 성도의 기도는 어떤 힘이 있는가(11절)?
! 느껴봐. 나는 주님을 위한 고난에는 마침내 그리스도의 위로가 있다는 견고한 소망을 붙들고 있는가?
➡ 옆으로 실천해. 내가 불평하지 않고 소망을 품고 견뎌내야 할 고난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Meditation. 고난과 위로의 선순환
바울은 고난의 미학을 외친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위로를 불러 오고, 그 위로는 밖으로 넘쳐 유사한 고난을 받는 사람을 능히 위로할 수 있게 한다(4절).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가 되게 한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고난은 다른 사람을 위한 대속성(代贖性)을 가진다(6절). 바울도 에베소 등지에서 정신적, 신체적 한계를 넘는 고난을 당했고 이로 인해 죽음까지 생각했다(8절).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처지였다. 그러나 그 고난들로 인해 오히려 자기를 의지하려는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겸손의 덕을 터득한다(9절). 그리고 자신의 증언과 삶의 본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고난보다 크고 풍족한 하나님의 위로의 크기를 확증하며 그 위로를 흘려보낸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은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위로로 마무리된다. 고난의 잔에 부은 하나님의 위로가 넘쳐흘러 옆으로 파급되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고난은 마이너스의 섭리가 아니라 플러스의 섭리다. 당신은 이러한 고난의 미학을 잘 누리고 있는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뜻’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는 신자, 비신자 할 것 없이 모두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 민족이 당한 고통의 역사도, 일제식민통치나 6·25전쟁 등에서의 처참한 살인과 폭력과 억압도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신학은 수학처럼 상황과 관계없는 불변하는 해답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는 실로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활동하시는 분이심을, 그분이 우리의 삶에 깊이 관여하시는 분이심을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20세기의 지옥인 처참한 아우슈비츠의 역사도, 부조리한 우리 삶의 역사도 아무런 반항도 없이 그대로 묵인하고 감내해야 한다는 말일까? 이렇게 참혹한 악의 역사가 예정된 것이라면 과연 이런 하나님을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20세기에 이르러 신학은 모든 세상사가 결정론적으로 예정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세상사를 결정론적인 인과율의 그물 안에 묶어두는 그런 신은 더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찬양하기도 어렵다.

그 뿐만 아니라 결정론적으로 이해된 예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조차 파괴해 버린다. 더구나 하나님이 영원 전에 세상사를 예정해 두셨다면,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역사할 필요도 없으며 또한 우리도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원 전에 세상사가 다 결정되어져 있다면 이제 하나님은 하실 일이 없지 않은가. 그분은 영원 전에 프로그램화된 세상사가 그대로 일어남을 그저 관망하기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사를 관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한다. 더구나 오늘날의 신학은 하나님은 억압자가 아니라 억압당하는 자의 편이시며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자의 편이심을 고백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희생당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지금도 이 뒤틀린 역사를, 지옥으로 치닫는 역사를 해방의 역사, 화해의 역사, 생명의 역사로 돌려 놓으신다.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도대체 절망과 좌절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희망할 수 있겠는가.

오래전부터 신학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분의 창조세계 돌보심을 표현하는 용어로 ‘섭리’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리고 ‘섭리’를 하나님의 창조로 이해했다. 17세기의 개신교 정통주의 교의학에 따르면 창조는 태초의 창조, 계속되는 창조, 마지막 창조로 구분된다. 섭리는 계속되는 창조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보존하시며 이끄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우리는 동참한다. 이를 협동(concursus)이라 표현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섭리는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외치는 피조물의 기도와 실천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결정론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예정이나 예지하심이라는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피조세계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뜻하는 섭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의 ‘뜻’도 결정론적이거나 숙명론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새로움의 사건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창조적 의지와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징은 생명의 충만과 해방을 뜻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창조명령의 성취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창조된 피조물이 그분을 닮아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살리며, 충만한 생명 안에서 살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피조세계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반목하고 서로를 지배하고 억압하며 반생명적인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한 현실이 우리 민족에겐 일제식민통치와 6·25전쟁으로 숱한 역사의 질곡으로 경험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이러한 지옥의 현실 가운데서도 신앙은 굴하지 않고 일어나 하나님의 뜻, 그분의 섭리, 그분의 새로운 창조와 구원을 붙잡고자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과거적 원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붙잡아야 할 미래이며 성취되어야 할 약속이다. 섭리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뜻 없이 무릎 꿇거나 운명에 맡겨 살지 않는다. 도리어 생명과 창조의 역사를 향해 일어서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기도한다.

<한국성결신문, 기독시론에서 가져왔습니다. 박영식 교수는 서울신대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다 예정된 것이라고요?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장로교의 영향이 막강하다. 장로교의 영향 때문인지 많은 교회에서 예정이란 말을 서슴없이 사용하곤 한다. 신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민감한 부분인데도 말이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예정해 놓으셨다면, 도대체 인간에게 자유란 있는 것일까?

도스토옙스키나 알베르 카뮈, 그리고 사르트르 같은 이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외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을 규정하는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에게 자유란 없다.’ 즉 신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신학사에는 예지라는 단어도 등장하고 예정이라는 단어도 등장한다. 엄밀하게 분석하면 두 개념은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바꿔 사용해도 무관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예측은 빗나갈 수 있지만 하나님이 예지하신 일은 예정대로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지는 곧 예정이다.

하나님의 전능을 고백함으로써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위대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자유의지론’이라는 책을 통해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파열을 잠재우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할지 이미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예지한 사건은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예지된 그 사건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일어난다. 하나님은 예지하고, 예지된 사건은 필연적으로 일어나지만, 그 사건의 원인은 자유의지에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예를 들어보자. 고수와 하수가 바둑을 둔다. 고수가 계획적으로 한 수를 둔다. 하지만 하수는 그 계획을 알 리가 없다. 고수는 자신이 이렇게 두면 하수가 저렇게 둘 것을 알고 있다. 예상대로, 틀림없이 하수는 그렇게 둔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보다 훨씬 수가 높으신 분이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할지 즉, 우리의 자유의지가 무엇을 선택할지 미리 알고 계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예지하신 바대로 그렇게 한다. 그에 따르면 예지하시는 하나님은 강제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지 미리 알고 계셨을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예정과 자유의지의 양립 가능성을 주장함으로써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두기보다는 자유의지를 행사한 인간에게 두고자 했던 것이다. 예정과 자유의지 사이의 논쟁은 중세신학을 넘어 종교개혁자들에게 이어진다.

하지만 루터는 예지와 자유의지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중세신학의 골치 아픈 논의에 철퇴를 가하며 그의 ‘노예의지론’에서 죽음과 저주, 재앙도 모두 하나님에 의해 일어난다고 못 박았다. 칼뱅도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면서 살인자나 행악자, 범죄자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라고 주장했다.

자유의지보다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주권을 강조하고자 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이렇게 모든 일에 예정을 앞세울 경우 하나님은 선한 분이 아니라 악한 존재로 생각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던 사람이 라이프니츠였다.

그는 하나님은 절대 선하신 분이라고 전제한다. 선하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에 앞으로 창조될 수 있는 세상들을 요즘 말로 하면 시뮬레이션을 해 본 후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다. 따라서 바로 지금 이 세상은 가장 좋은 세상이다.

그렇다면 설령 이 세상에서 이해 불가능한 악을 경험한다고 해도 이 악은 가장 좋은 세상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가 죽고 난 후, 1755년 11월 1일 리스본에 진도 9의 대지진이 일어나 리스본 시민의 3분의1 가량이 죽고 85%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예정을 앞세운 기계적인 낙관론은 현실적으로 치명상을 입는다. 볼테르는 라이프니츠의 낙관론을 빗대어 ‘캉디드’라는 풍자소설을 발표해 예정론을 비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칼뱅이 예정론을 처음 강조했을 때 그는 예정과 선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쫓겨난 신자들을 위로하고자 했다. 가톨릭교회는 너희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너희를 선택하셨다고 설교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 천편일률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딱지를 무책임하게 붙인다면 귀중한 신앙적 고백은 또다시 비웃음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성결신문, 기독시론에서 가져왔습니다. 박영식 교수는 서울신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왜 형통하는가?

종종 사극드라마를 보면, 갖은 수단을 동원해 권좌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기 배만 채우는 자가 등장한다. 온갖 모략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한평생 편안한 삶을 살아가다가 말년에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뒤집힐 때 옥살이를 하게 된다. 소위 권선징악으로 드라마는 끝이 난다.

‘그래, 착하게 살아야지’라는 도덕적 감정과 ‘조금 나쁜 짓을 해서라도 저런 부귀영화를 누려봤으면 좋겠다’라는 현실적 소원이 충돌한다. 여기에 이생의 삶이 전부라는 세속주의까지 가세하면현실론으로 생각은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드라마 속 악인의 입에서도 이런 대사가 튀어나온다. ‘극락왕생은 무슨? 나는 이 땅에서 이미 극락 중의 극락을 맛보았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도 보고 듣고 부딪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왜 의롭게 사는 사람보다 악한 자들이 더 떵떵거리면서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인지? 구약성서의 한 지혜자는 이렇게 권면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어쩌면 이제 막 직장생활에 뛰어든 현실감 없는 자식의 미래를 염려하는 부모의 말씀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왠지 몸을 사리면서 정의로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말고 얼버무리면서 살라는 다소 비겁한 말로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왜 악인이 형통하는 것일까?

사실 이 질문은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악인이 형통하는 사회를 용인하고 있는가? 우리는 왜 정의롭고 선하게 살라고 하면서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는가? 왜 우리는 선으로 악에 맞서 싸우지 않는가?

이제 신학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왜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을 내버려두시는가? 이 질문에 대해 고전적으로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리라 본다.

첫째,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을 그저 관망하지 않으신다는 대답이다. 하나님은 악인을 역사로 심판하신다. 비록 악인들이 흥왕한 듯 보이지만, 역사는 악인들을 심판하고 불의와 부정을 넘어 자유를 향해 나아간다. 물론 막연한 발전사관은 인본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한 낙관을 잉태하지만, 신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가 역사 안으로 돌입하여 들어옴을 부정하지 않는다.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한없이 성장해 나가는 상향적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이 세상 안으로 돌입해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악인을 심판하며 인류의 역사를 정화하며 승화시킨다.

둘째, 기독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신앙함으로써, 역사 내의 심판이 성취하지 못한 것의 완전한 실현을 희망한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선취(先取)되었고, 의인들의 구원과 악인들의 심판이라는 우주적 사건에 대한 희망을 뜻한다.

인류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구현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당신의 역사로 온전히 성취하신다. 이러한 종말론적 신앙은 역사초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결코 역사를 등지는 탈속적인 성격과는 무관하다.

악인의 형통을 목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해서도 안 되지만(잠 24:1,19, 시 73), 정의롭고 선한 길을 무의미하게 여겨 포기해서도 안 된다(시1:1, 37 :27). 오히려 악인의 형통함은 우리시대와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 사이의 불일치와 갈등으로 이해해야 한다.

곧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따라서 악인의 형통함 앞에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기도하고 실천해야 한다. ‘주의 나라 오시옵소서.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왜 악인을 내버려두시는가?

성서는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신다고 하면서도, 또한 악인에게도 자비를 베푸신다(마 5:45)고 말한다. 어쩌면 하나님은 무한한 긍휼을 통해 악인을 부끄럽게 함으로써 그를 심판하며 또한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악인의 진정한 악함은 그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함에 있을 것이다(습 3:5).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함을 그저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악인에게도 무한한 긍휼과 자비를 베푸심으로 오히려 그를 부끄럽게 하신다.

<한국성결신문, 기독시론에서 가져왔습니다. 박영식 교수는 서울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분명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선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피조세계는 본질적으로 그분을 닮아 선해야 할 텐데, 왜 우리는 악을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 도대체 악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인가? 왜 악이 존재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다분히 추상적이고 사변적이지만 우리의 실제 생활과 전혀 무관한 질문은 아니다.

시편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이런 질문이 탄식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편 10편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편 13:1)

비단 성서뿐이겠는가. 지난 수난주간에 모든 사람을 침울하게 하며 안타깝게 했던 세월호 참사를 목도하면서 나는 한없는 무기력과 부끄러움, 또 한편으로는 분노,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왠지 모를 죄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단 나뿐이 아니었다. 학생들도 무기력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듯보였다. 교내 채플 기도시간마다 흐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고, 흐르는 눈물을 남몰래 닦아내야만 했다.

결국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얼 하고 계셨는가? 선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일반 사람들은 비아냥거리면서 이런 투의 질문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가슴을 치며 이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왜 바라만 보고 계셨습니까?’

신학사에선 오래전부터 이런 질문에 나름대로 다양한 답변을 제시해 왔다. 후에 이런 답변을 신정론(神正論)이라 명명했는데, 여기서 몇 가지만 간추리면 이렇다.

첫째는 미학적 신정론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시는 아름다운 세상에는 어둠이 필요하다. 마치 아름다운 회화에도 어두운 색깔이 사용되듯이, 아름다운 음악에도 불협화음이 사용되듯이, 그렇게 이 세상에 나타나는 악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다. 미학적 신정론에 따르면 지옥조차 아름답다.

둘째는 교육적 신정론이다. 하나님은 환난을 통해 우리를 더욱 성숙하게 만드신다. 어릴 적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듯이 하나님은 불 같은 시험으로 우리를 정금같이 단련하신다. 여기서 고난은 축복의 통로이다.

셋째는 역사-종말론적 신정론이다. 지금 일어나는 악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께서 역사의 심판을 통해, 그리고 더 나아가 최후의 심판을 통해 극복하고 제거하실 것이다. 역사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마치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역사는 과거보다는 현재가, 현재보다는 미래가 더욱 아름답고, 결국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통해 억울한 악의 희생자들은 위로를 받고 지복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위로와 희망의 중심축이 될 것이다.

이름은 낯설더라도 익히 설교를 통해 많은 들었던 내용이리라. 신정론의 여러 가지 답변들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변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악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은 인간(고난당하는 자)의 질문 앞에 서게 되고 그 질문 앞에서 이제 인간(신학자)이 하나님을 변호하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어쨌든 전통적인 신정론의 답변은 고난에는 ‘나름 이유’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고난당하는 당사자 자신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인용한 시편을 묵상해 보자. 시편의 질문은 철저히 고난당하는 당사자의 절규를 드러내고 있다. 신앙의 질문일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과격하고 숨김이 없다.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도 이렇게 부르짖지 않았던가.

우리는 고난과 악에 대해 재빨리 하나님을 변호하고 신앙의 답변을 주려 하지만, 성서는 오히려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십자가에서 부르짖는 아들 예수의 아픔 안에 함께 아파하시며, 죽어가는 아들 안에서 더 철저히 죽음을 감내하신 아버지 하나님, 그분만이 고통당하는 자를 진정 위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신다. 그분도 아파하며 죽음을 경험하신다. 그리고 절규하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타인의 고통에 무덤덤한 자들의 세상을 심판하시며 고통당하는 자들의 영원한 버팀목이 되어 주신다.

<한국성결신문, 기독시론에서 가져왔습니다. 박영식 교수는 서울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는가?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고백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병든 자를 치유하신다. 성서의 보도에 따르면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없다.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전능성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Nothing is impossible(불가능은 없다).’ TV 광고의 문구다. 기독교 신학이 하나님의 전능성을 말해 왔다면 우리 시대는 인간의 전능성을 주장한다. 기술과 과학을 앞세워 우리 시대는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할 뿐 아니라 불가능이라는 말 자체를 부끄럽게 여긴다.

전능한 과학이 환경문제를 비롯한 미래의 염려를 깨끗이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다. 의사도 마찬가지다. 중환자의 수술을 앞두고 ‘이것은 무모한 수술입니다. 불가능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남긴다.

비단 의사뿐인가. 피로사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개개인도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극도의 과장 속에서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드는 데 익숙하지 않은가.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전능성과 인간의 전능성은 어쩌면 서로를 닮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 캐릭터,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등은 신적 전능성과 인간의 전능성 사이의 심리적 교환이 상품화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속에서 현대인은 자신의 현실적 무능함을 파괴하고 쟁취하지 못한 신적 전능성을 만끽한다. 그뿐이 아니다. 신앙의 현장에서도 전능성에 대한 인간의 애착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포장된다. 힘을 숭상하는 인간의 욕망은 ‘믿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전능의 딱지가 달라붙어 상한가를 차지한다.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전능으로 포장할 때, 전능은 ‘만능’으로 둔갑한다. 하나님의 전능은 도깨비방망이가 되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니, 도깨비방망이를 손에 들고 소원을 비는 인간 자신을 위해 뭐든지 해야 하는, 반드시 해내야 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이 말해 왔던 하나님의 전능은 이런 의미의 만능이 아니다.

전능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고전적인 의미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것을 뭐든지 하실 수 있다.’ 이 고전적인 전능의 정의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하여 중세신학자들에게서 세밀하게 분석되고 논의된다.

하나님은 현실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하실 수 있는가? 즉, 하나님은 1+1의 답을 3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나님은 네모 난 삼각형을 만드실 수 있는가? 또한 ‘돌의 역설’이라 불리는 대로 하나님은 자신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돌을 만드실 수 있는가?

만드실 수 없다면 무능한 것이요. 만드실 수 있다 해도 들 수 없으니 무능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뭐든지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악을 행할 수도 있는가? 하나님은 거짓말도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병에 걸릴 수도 있는가?

설령 하나님이 뭐든지 다 하실 수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무엇이든지 다 하시는 분은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하시는 분이시다. 이 말을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에 부합하는 일을 하신다고 정리해 보자.

그렇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이나 악한 일을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뭐든지 마음대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인 사랑에 부합하는 일을 하신다.

즉, 기독교 신앙이 고백하는 전능은 뭐든지 다 한다는 식의 만능도 아니고, 자기 맘대로 한다는 식의 자의도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현실을 비현실로 만드시거나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무지막지한 힘만을 과시하려는 그런 괴물이 아니다.

현대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하나님의 전능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아버지 되심의 사랑을 배제한 전능은 세속적인 독재자의 무자비한 힘에 불가하다.

더 나아가 오늘날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전능의 본질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의 고난에 동참하신 낮아지심과 비움의 사랑에서 찾는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의 전능은 자신의 힘을 과시함이 아니라 오히려 약함에서 계시된다(고후 12:9).

그리스도 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약해질 수 있는 자기 비움의 힘을 보이셨다(빌 2:7). 그리스도인도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자랑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후 11:30, 12:10).
<한국성결신문 기독시론 에서 가져왔습니다. 박영식 교수는 서울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

우리의 몸이 이상 징후를 발견하는 것은 복이다. 그것 때문에 검진하고,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며 처방에 따라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몸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경건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그럴싸하게 갖추어져 있는 경건의 모양에 익숙해져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며 영적 무력증에 빠지는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고 경건의 능력을 상실해 갈 때는 과연 어떤 증세를 수반하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이 없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사야 29:13)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 설령 그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려 한다. 하나님의 마음보다는 내 마음의 원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고, 때로는 나의 원함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지기만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다. 스스로 생각할 때 니느웨는 멸망 받아 마땅한 도시인데 그곳으로 가서 메시지를 전하라던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 채 다시스로 달아났던 요나와 같은 모습이다. 자신이 원하는 곳도, 자신이 원하던 방식도 아니기에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무심한 선지자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다.

진리가 아닌 감정이나 상황을 쫓는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이 느끼는 안전지대에 일치되는 상황이 전개될 때 그것을 무조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붙잡고 있는 진리가 맞기 때문에 그것을 향해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러므로 그 상황을 좇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상황은 늘 변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붙잡는 자는 삶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 속에 더욱 견고해지고 진리에 일치되는 삶에 가까워지지만, 상황을 좇는 사람은 삶에 늘 요동함이 있다. 상황에 따라 늘 흔들리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으로 인해 요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가?

공동체가 아닌 나만의 유익을 구한다(?)
목회의 현장에 있는 적지 않은 지도자들이 “요즈음 성도들이 너무 바빠서요 모이기가 너무 힘들어요! 잘 모이지 않아요!” 등과 같은 아우성을 쏟아 놓는다. 개인이 처한 눈앞에 필요에 무게중심이 이동하기에 공동체를 향한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 세속화의 물결이 거세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을 띠기 시작한다. 때로는 세상의 그러한 흐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하며 변명의 기회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공동체적 삶을 가르친다.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면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5)고 말한다. 교회 공동체의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는 신앙의 선배들이 남긴 공동체를 향한 희생과 섬김이었다. 지도자들은 양들이 모여있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놓았다. 양들은 그러한 지도자들 신뢰하며 자신들의 젖과 털을 아낌없이 내어 놓았다. 모두가 공동체를 위해 시선을 고정했다. 공동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 속에서 지도자들은 공동체를 통해 사사로운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성도들은 편의점 드나들듯이 신앙 생활하는 부작용이 심상치 않다.

은혜를 구하는 간절함도 없고 감사도 사라진다(?)
긴 옷이 생겼다. 시장을 나가보면 사람들이 문안한다. 어디를 가도 이제는 나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어느덧 많은 것을 누리게 된 사람들에게 내부변이를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망가뜨리는 암과 같이 생겨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간절함’의 상실이다. 물이 없어 황폐할 때는 주님을 향한 갈망이 극대화되지만, 갈증이 해소되고 어는 정도 필요한 물을 비축하게 되면 황폐할 때 품었던 간절함이 사라지는 현상이 우리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삶이 풍요로워져서 은혜를 갈구함과 같은 앙모함이 없는 것보다 물이 없어 황폐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갈망과 간절함이 큰 것이 우리에게 복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하여 간직된 ‘간절함’의 정도를 측정해 보라!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마 5:7) 긍휼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누리는 복 가운데 하나이자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긍휼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역으로 내가 누군가를 향하여 긍휼을 흘려보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선한 물을 받아들이고, 그 물을 적당히 흘려보내는 자연스러운 순환이 있을 때 호수의 건강함이 유지된다. 받아들이기만 하면 물이 범람하여 오히려 주위를 망가뜨린다. 흘려보내기만 하면 바닥이 노출되고 마른 땅으로 황폐케 된다.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를 은혜의 바다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케 하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고 계시지 않는다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강도들로 인해 삶에 절박함에 노출된 약한 이들을 향한 긍휼을 흘려보낼 수 없다. 나만 풍성해져 주변을 황폐케 하던가, 줄 것이 없는 메마른 심령이 되든가 할 테니까 말이다.

<World Teach. 사람을 세우는 사람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