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23. QT큐티체조.

간단설명. 바울은 자신의 방문이 고린도 교회에 근심이 될 것을 알고 눈물과 사랑의 편지로 대신하겠다고 밝히면서, 교회 안에 성도 사이에 생기는 근심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용서와 위로를 권고한다.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2:1-11
한글본문.
1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2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3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5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7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9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영어본문.
1 So I made up my mind that I would not make another painful visit to you. 2 For if I grieve you, who is left to make me glad but you whom I have grieved? 3 I wrote as I did so that when I came I should not be distressed by those who ought to make me rejoice. I had confidence in all of you, that you would all share my joy. 4 For I wrote you out of great distress and anguish of heart and with many tears, not to grieve you but to let you know the depth of my love for you. 5 If anyone has caused grief, he has not so much grieved me as he has grieved all of you, to some extent–not to put it too severely. 6 The punishment inflicted on him by the majority is sufficient for him. 7 Now instead, you ought to forgive and comfort him, so that he will not be overwhelmed by excessive sorrow. 8 I urge you, therefore, to reaffirm your love for him. 9 The reason I wrote you was to see if you would stand the test and be obedient in everything. 10 If you forgive anyone, I also forgive him. And what I have forgiven–if there was anything to forgive–I have forgiven in the sight of Christ for your sake, 11 in order that Satan might not outwit us. For we are not unaware of his schemes.

도움말.
근심(1절 등). 본 단락에서 명사형(뤼페)과 동사형(뤼페오)으로 아홉 번이나 쓰였다. 원문에는 여덟 번 사용되었다(우리말 성경에는 5절에서 중복 해석했다).

큐티체조.
⬆ 위로 하나님. 그리스도 앞에서는 어떤 역사가 이루어지는가(10절)?
⬇ 아래로 인간. 성도는 근심을 끼친 사람들을 벌한 후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가(7-8절)?
? 물어봐. 고린도 교회와 성도에 대한 바울의 사랑의 증거는 무엇인가(4절)?
! 느껴봐. 나는 용서와 위로와 사랑이 사탄의 계책을 깨뜨리는 효과적인 무기라는 사실을 확고히 믿는가?
➡ 옆으로 실천해. 오늘 내가 그리스도 앞에서 용서와 위로와 사랑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할 지체는 누구인가?

Meditation. 근심을 치유하는 묘약, 사랑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진 일전의 방문으로 인해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 사이에 상처와 근심거리들이 생겨났다. 바울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방문하려 했으나, 이것이 오히려 서로의 상처와 근심을 가중시켜서(3절) 양자 모두 사탄의 계책에 빠지게 할 수 있음을 간파하고(11절) 많은 눈물을 담아 쓴 편지만을 보낸다(4절). 그리고 그 편지 속에 근심으로 곪아가고 있는 관계망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랑(4, 8절)의 묘약을 전달한다. 특히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켜 징계 받은 사람의 마음속 근심에까지 그 사랑의 묘약을 풀어 녹여내어 공동체로 하여금 그리스도 앞에 바로 설 것을 권고한다.
공동체 안에서 생겨나는 모든 상처와 그로 인해 깊어가는 근심을 해소하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지식도, 회의도, 권징도 그 자체로 상처와 근심을 치유할 수는 없다.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가장 좋은 길은 분명 사랑이다(고전 13:13). 당신은 공동체 안에서 이러한 사랑의 묘약을 풀어 녹여내고 있는가? 공동체 안에 그 사랑의 약효가 필요한 곳은 어디인가?
<young2080에서 가져왔습니다>

 

정답과 일치하는 선택.

1
가족 캠핑을 마치고 한 가정이 어두운 도로를 조심하며 커브를 꺾는 순간, 중앙선을 마주 달려오던 음주운전자의 차가 그의 가족을 덮쳤다. 조금 전까지 가족과의 행복한 시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편과 아이 셋만 남긴 채 사랑하는 아내와 셋째 아이, 그리고 어머니와는 먼 이별을 고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이란 저서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럴드 싯처의 삶의 이야기이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삶의 깊은 상실 앞에서 정말 정직하게 반응하며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울었던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우리는 어둠을 뒤로 하고 도망칠 수도 있고, 아니면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가 상실에 따른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기 연민에 빠져 살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이들과 마음을 함께하며 그들의 고통을 나 자신의 고통처럼 보듬어 줄 수도 있다. 슬픔으로부터 도망치느라 어딘가에 중독될 수도 있고, 아니면 슬픔과 벗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당한 기만의 상처들을 끌어안고 지낼 수도 있고, 아니면, 비록 그럴 이유가 없어 보인다고 해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 수도 있다. 악으로 악을 되갚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선으로 악을 이길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두드러지게 달라진다. 선택의 힘은 참으로 놀랍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간성에 존엄성이 더해지기도 하고, 상황을 딛고 일어설 줄 아는 능력을 얻게 되며, 희생자의 처지에서 자유롭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선택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선택을 내릴 능력도 있고 또 바른 선택을 내려야 하는 당위성도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우리가 내리는 선택은 종종 번민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쪽으로 이루어진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잔인하게도 삶은 때때로 좋고 나쁜 상황과 환경을 넘어 우리로 하여금 평소에 붙잡고 있던 정답을 경험적으로 확신하도록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한다. 이때 우리는 번민과 갈등에 사로잡혀 괴로움의 한가운데 서게 될 때가 있다. 마치 제럴드 싯처의 삶에 찾아온 상실의 순간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선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갑작스럽게 다가온 삶의 깊은 상실감 앞에서 이론적 확신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을 향한 바르고 건강한 선택을 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정답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그 정답으로부터 먼 선택을 하도록 만들거나, 처한 상황이 애써 그 정답을 외면하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비록 잘못된 선택을 한다 할지라도 그 선택에 대한 변명과 명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남편을 비롯한 집안의 세 남자가 죽은 삶에 찾아온 깊은 상실감을 맞이하며 선택의 갈림길에 선 한 여인을 소개한다. 룻의 이야기다. 삶에 찾아온 위기 속에서 그녀는 시어머니를 따르기로 선택한다. 자신 민족과 신앙을 향하여 돌아가는 길이 아닌, 왕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을 선택한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며 스스로 왕이 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이스라엘의 영적으로 척박한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보다 더 깊은 상실감에 젖어 있는 노모와 함께하는 여정을 기꺼이 선택하며 이방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왕 되심을 삶으로 고백하며 어떠한 어려움과 역경이 다가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절대 굴복하지 않고 베들레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룻에게는 시어머니를 따르지 않아도 내세울 수 있는 나름대로 변명과 명분이 있었지만, 인생의 깊은 상실감 앞에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란 고백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먼 미래를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이렇게 선택하면 무엇인가 보상이 따르겠지?”라는 생각조차도 그녀의 상황 속에서는 사치였을 정도로 상실의 한복판에 있었지만, 있는 그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붙잡고 그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계획은 그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깊은 상실의 자리에서 모든 갈등과 고통을 극복하며 정답을 선택한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는 당신을 왕으로 고백하는 연약한 여인을 왕의 가문으로 세우는 불후의 명작 완성하는 것으로 움직였다.
수 없이 반복해야 하는 선택의 연속 가운데서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답에 일치하는 선택을 하고 있는가? 선택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 옳은 것, 기뻐하시는 것, 선하신 것인가? 라는 부분이다. 선택은 언제나 상황을 근거로 해서는 안 된다. 선택은 진리를 붙잡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삶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감정적 거리와 우리가 붙잡아야 할 진리와의 거리를 끊임없이 좁혀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에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것의 일치(엡 4:13)와, 더 나아가서 알고 있는 정답과 우리의 선택이 일치되는 하나님 자녀다움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World Teach. 사람을 세우는 사람 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