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

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
김수호 목사님입니다. 한국과 일본, 미국에서 선교와 지역교회 목회 사역을 하셨습니다.
최근에 침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머리에 출혈이 생겨 수술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고령이신지라 회복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분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사역 계획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
1. 휴유증 없이 예전과 같은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2. 유종의 미(Well Done)를 위해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3. 남은 생애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4. 함께 사는 사모님의 건강 또한 더 악화되지 않도록
5. 두분이 더 친밀해지고 서로 보살핌에 더 의지할 수 않도록
6. 두분이 끝까지 성령님의 보호하심을 받도록

갓피플 여러분, 김목사님과 사모님을 잘 알지 못하겠지만, 중보기도에는 능력이 있어서 이들을 회복하고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우리의 중보가 하나님의 뜻에 동참 할 수 있도록 기도부탁합니다.

2014-01-17 QT큐티체조. 디아스포라 교회의 사명

디아스포라 교회의 사명 (행 11:19-26)
한글본문.
19.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영어본문
19.Now those who had been scattered by the persecution in connection with Stephen traveled as far as Phoenicia, Cyprus and Antioch, telling the message only to Jews.
20.Some of them, however, men from Cyprus and Cyrene, went to Antioch and began to speak to Greeks also, telling them the good news about the Lord Jesus.
21.The Lord’s hand was with them, and a great number of people believed and turned to the Lord.
22.News of this reached the ears of the church at Jerusalem, and they sent Barnabas to Antioch.
23.When he arrived and saw the evidence of the grace of God, he was glad and encouraged them all to remain true to the Lord with all their hearts.
24.He was a good man, full of the Holy Spirit and faith, and a great number of people were brought to the Lord.
25.Then Barnabas went to Tarsus to look for Saul,
26.and when he found him, he brought him to Antioch. So for a whole year Barnabas and Saul met with the church and taught great numbers of people. The disciples were called Christians first at Antioch.

첫번째 흩어짐- 바벨탑.
한국 속담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결을 강조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일을 위하여 단결하는 일은 언제나 좋은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마음을 하나로 하여 힘을 합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일관성있게 사용하신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흩어짐의 전략이었습니다. 대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후손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고 다시 명령하셨습니다 (창9:1). 이 명령은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실 때 아담과 하와에게 명령하셨던 것을 반복했던 내용이었습니다 (창 1:28).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번성하여 온 땅에 흩어질 것을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의 명령에 본격적으로 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 높고 웅장한 탑을 통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내는 것이었고, 또 한 가지는 흩어짐을 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향하여 교만한 생각을 나타낸 것이고 두 번째 계획은 하나님의 명령을 전면적으로 도전하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인류의 도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취하신 방법은 그들을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그들을 땅에 흩어지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후로부터 민족이 생겨나게 되고 지구 곳곳이 다양한 민족으로 채워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창 10:5, 18, 25). 인간들은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원래 모든 인류가 지구에 흩어져서 충만하기를 원하셨던 그 계획을 실천해 가셨습니다.

두 번째 흩으심- 디아스포라 회당.
하나님께서 또 한 번 흩어짐의 전략을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그들을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도 이 일이 일어나기 수 백년 전에 이미 신명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일이었습니다 (신 28:25, 64). 그래서 그들은 이후로 전세계에 흩어져야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우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디아스포라는 헬라어로서 “흩어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한 번 경건하지 않은 이스라엘을 훈련시키시기고 또 이스라엘의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흩어짐의 전략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한 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던 그들을 지역 마다 회당이라는 예배 처소를 만들었습니다. 그 곳에서 그들을 예배를 드렸고 유대인들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장소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회당을 세계 선교에 전략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바로 이방인들이 이 회당을 통하여 유대교로 개종하는 역사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원래 이스라엘이 열방을 향하여 행했어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출 19:5,6절에 보면 유명한 시내산 언약이 나옵니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 제사장 나라가 언급됩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하나님과 열방 사이에 중보하는 제사장의 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디아스포라 회당을 통하여 그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회당은 후에 선교사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전초기지로 사용하게 됩니다. 바울은 방문하는 모든 지역에 가서 회당을 중심으로 전도했습니다. 거기에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회당을 통하여 순식간에 아시아와 유럽이 복음화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디아스포라, 즉 흩어짐의 전략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전략은 역사를 통해서 반복되어왔습니다. 오늘날에도 전세계에서 유학이나, 사업, 전쟁 등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서 타국에 가서 삽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디아스포라들 입니다. 한민족도 남북한 인구를 합치면 7천만 가량이 되는데 이중 10%에 해당하는 7백여만 명 정도가 해외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러한 7백만이 전 세계에 흩어져서 약 5천 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가는 곳마다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교회를 세웁니다. 그래서 이러한 한인 교회를 통하여 수 많은 디아스포라 한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인 디아스포라의 복음화율은 본국의 그것보다 훨씬 높습니다. 이스라엘의 디아스포라 회당을 통한 전략적인 복음 전도가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를 통하여 21세기에도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흩어짐- 초대교회의 박해.
방금 읽었던 본문에도 이러한 디아스포라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에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환난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이 흩어졌어야만 했습니다. 그 때에 믿는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서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갔습니다. 그 때 대부분의 성도들이 흩어진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요즘은 한인 교회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5천개의 한인 교회중에서 타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브로와 구레네에서 온 몇 사람들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안디옥에 와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방인인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외국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본토에서 난 유대인들보다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이 덜합니다. 그들에게는 문화나 언어 면에서 외국인들과 익숙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더 수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한 복음을 들은 헬라인들이 믿고 주님께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안디옥 교회는 담임 목사격인 바바나와 수석 부목사격인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유럽의 역사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유럽의 역사를 바꾼 교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지역 교회의 파워는 이렇게 강한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를 이기며 천국 열쇠를 가진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한 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하여 유럽의 역사를 바꾸는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도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성령의 권능을 얻기만 하면 이러한 일이 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파워입니다. 안디옥 교회도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께서 말씀하셨고 성령님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도 이러한 안디옥 교회와 같은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이 땅에 와 있는 130여개의 소수 민족이 주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이 교회를 세우셨다고 믿습니다. 제사장 나라, 그것이 오늘날 이스라엘의 영적인 역할을 계승한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디아스포라- 보내심의 믿음과 사명.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위대한 일 앞에 우리가 생각하고 믿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오늘 이 곳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안디옥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매우 전략적인 곳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 당시 로마 제국의 제 세 번째로 크고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 곳에는 로마 제국 각처에서 교육과 상업과 문화의 기회를 찾기 위해서 많은 민족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고 이 교회를 통하여 나중에 로마제국이 복음화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하셨습니다. 지금 DFW (Dallas Fortworth)도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DFW는 아틀란타와 함께 미국의 Bible-belt라고 불리우는 지역입니다. 이러한 곳에 여러분들을 오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삶의 주거지를 옮기거나 우리가 무엇을 할 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보내심을 받아서 이 곳에 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보내심을 매우 강조합니다. 이것을 선교라고 합니다. 선교는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선교사(Missionary)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이 곳에 보내심을 받은 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각자가 서로 다른 이유가 있어서 이 곳에 왔을지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사업 때문에, 어떤 분들은 자녀 교육 때문에, 어떤 분들은 자신의 공부를 위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고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보내기 위해서 사용한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은 것 때문에 하란에 가서 20년을 디아스포라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기회를 통하여 야곱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12 아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팔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형들을 만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먼저 그 곳에 보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눈으로 볼 때는 형들이 시기해서 그를 팔았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원래 요셉을 애굽에 보내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단지 그 일을 위해서 형들을 사용한 것 뿐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이 이 곳에 왔다면 그것은 불신앙일 것입니다. 심지어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 일을 계획하시고 이 곳에 오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계획을 가지시고 여러분들을 이 곳에 보내신 것입니다. 많은 몽골인들이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한국에 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코리안 드림을 kingdom 드림으로 바꾸고 계십니다. 몽골에 있었으면 교회 나가기 어려운 사람들을 한국으로 보내서 예수님을 믿게 합니다. 이것이 디아스포라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주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공중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탄 비행기기가 태평양을 건너 이 곳에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목적과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특별한 목적을 가지시고 우리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4학년 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저의 삶은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그 때 저에게 한 가지 깊은 의문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부르신 것은 알겠는데, 무슨 일을 위해서 나를 부르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것 때문에 1년 정도를 기도했습니다. 그 때 저는 회사에서 무역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느날 친구와의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저를 해외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부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부터 저는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주님께 보내심을 받은 분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입니다. 더우기 디아스포라 한인들을 이 곳으로 보내시고 부르시는 주님의 뜻은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인 교회에 소망를 두고 사역을 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한인 교회를 선교의 교두보로 부르셨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모든 교회가 선교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특별히 디아스포라 한인 교회는 그 선교적 부르심이 더더욱 선명합니다.

이 부르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 부르심에 순종할 때 여러분들은 왜 내가 여기에 와 있는가 하는 의문이 풀릴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여기로 인도하시고 이 곳에 두신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는 주님의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을 따라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 사명을 따라 사실 때 여러분들 자신의 직업과 자녀들에 대한 미래가 보일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부모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그 아이들을 부르시는 부르심에 반응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의 장래를 책임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청지기로서 어느 한정적인 시기와 역할을 책임질 뿐입니다. 아이들의 궁극적인 책임은 주님께서 지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부르심에 순종할 때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는 주님의 약속에 여러분 자신과 자녀들을 맡겨 보시기 바랍니다.

디아스포라 여러분들의 부르심은 특별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직업을 복음의 통로로 귀하게 여기십시오. 이웃에서 만나는 여러 민족들과의 특별한 만남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소중히 사용하십시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전력하십시오. 안디옥에 가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몇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축복하셔서 안디옥 교회처럼 한 민족의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자신과 교회를 그런 위대한 교회로 사용해 주시기를 함께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송기태 선교사 (singasong62@hotmail.com) 미션 달라스 총무 (missiondallas.org)의 글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중보기도 요청합니다.

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
경북 안동에서 로뎀의원을 하고 있는 임승현 집사님입니다. 웹처치 갓피플에 협력하시는 분이고요.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고자 대전을 떠나 경북 안동으로 이사하셨고, 그 지역과 지역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하기 위해 허리를 장시간 주기적으로 구부려야 하는지라 가끔씩 허리가 아팠었는데,
자신의 검진과 치료를 위해서 2-3주의 기간이 필요한데 병원사정상 쉴 수 없답니다.
최근에 음직이기도 힘들정도로 허리가 아파서 치료를 위한 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

1.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들이 지역을 섬기고 있는데 건강으로 더 잘 섬길 수 있도록
2. 아픈 허리가 빨리 완쾌되도록
3. 중보기도를 통해 허리가 나았음으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에 확신을 더하도록 기도부탁합니다.

이 분을 잘 알지 못하시겠지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이 분의 사역에 동참코자 기도하면, 분명히 아픈 허리가 나을 것을 믿습니다.

2014-01-16 QT큐티체조.

이머징 처치 (Emerging Church) 운동

이머징 처치
성령께서는 교회가 시대에 따라 그 소명을 다하도록 인도해 오셨다.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인 사회의 문화적 변화에 따라 상황화를 거듭해 왔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는 수도원 운동으로, 15세기에는 종교 개혁을 통한 개신 교회의 형태로, 그리고 20세기에는 오순절 은사주의 운동 등등으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교회의 형태를 이머징 처치 (Emerging Church)라고 부르고 있다. 이머징은 아직 이 운동의 구체적인 실체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도 붙여진 이름이다. 단지 점점 더 시간이 갈수록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이머징 처치로 명명한 새로운 운동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구현’이다 (이머징 교회, 2005). 포스트 모던 시대를 기준으로 서구 교회가 더 이상의 ‘기독교 왕국’ (Christendom)이 아닌 것으로 스스로 인정하면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운동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이머징 교회 운동’이다. 이머징 교회들의 세 가지 흐름들을 살펴보자.

각교회 중심에서 하나님 나라로
에디 깁스와 볼저는 공동 저서인 ‘이머징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이머징 교회들의 공통점이며 핵심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주님의 교회들은 지금까지 나름대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해 왔다. 그러나 서구 교회들이 보여준 ‘기독교 왕국’과 같은 아이디어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관계를 혼동한 데서 기인한 축소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게 하는 대리인 (agent)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교회의 핵심적인 주제인 동시에 핵심적 지향점이 되어야 마땅하다. 주기도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마 6:10)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숙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교회의 핵심적 사명과 주제라면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눅 4:18).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각 교회들은 먼저 개교회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 사랑으로 하나됨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며 주님을 증거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요 14:34,35). 하나됨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독특한 특징이며 모든 믿는 교회들이 추구해야 할 본질이다(요17:11,20-26). 교단 연합을 추구하며 초교단 연합을 추구하는 운동이야말로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고 있다는 가장 가시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또한 전세계의 교회와 함께 하는 지역 교회의 열심의 균형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하는 지역 교회의 건강한 영성으로 작용 하게 될 것이다.

내부적 활동에서 외부적 사역으로
지역 교회가 개교회중심적인 모습에서 탈피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른 바 선교적인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까지 해 왔던 사역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을 섬기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역들은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다. 아니,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훈련과 활동들은 세상을 섬기기 위한 것들로 이루어져야 한다. 마치 훈련소가 전투를 위하여 준비하는 기관인 것 처럼 말이다. 세상을 섬기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정리한 다음에는 이제 본격적으로 지역 (Local)과 세계(Global)을 섬기기 위한 목표들을 설정하여야 한다. 가장 먼저는 지역 교회가 속해 있는 지역 사회를 향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조사하고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지역 전도도 지역 사회를 섬기는 활동들과 병행해야 한다. 지역 주민들의 필요를 채우며 지역 주민들을 사회적 연결망으로서 교회가 기능해야 한다. 동네의 주요 활동들에 교회가 참여하여 더 나아가 주도할 필요가 있다. 이런 활동들이 조금씩 발전하면 교회는 점차 내부 지향적인 모습에서 외부 지향적인 교회로 전환하게 될 것이다. 이런 교회들이 많이지게 될 때 주변의 교회와 함께 하는 이른 바 한 지역에서의 연합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될 것이다.

축소된 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주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언제나 천국 복음,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다 (마 3:2;4:17,23;9:35;10:7). 천국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고 하는, 즉 공의롭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통치가 전 우주적으로 임하게 된 복된 소식이었다 (사52:7). 그렇다면 복음은 단지 한 사람이 예수 믿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정도로 설명하는 복음의 축소주의 (reductionism) 그 이상의 훨씬 더 크고 위대한 소식이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천국 복음은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서 보듯이 모든 사회 계층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함께 모든 사회 영역에 대한 변화를 의미했다 (눅 3:7-14). 천국 복음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들의 것이었다(눅 4:18).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처럼 가난한 자들이야 말로 천국을 받아들인 만한 준비가 누구보다도 되어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눅 6:20). 성도들의 직장 생활 가운데 복음에서 소외된 가난한 자들을 향하여 복음이 능력이 누룩처럼 퍼져야 한다. 성과 속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시각이 극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총체적 복음이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 변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을 향해 가고 있다면 교회들도 복음의 완성도를 점점 더 높이는 쪽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새로운 교회가 다가온다.
이제 지역 교회들은 두 가지 면에서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한 가지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생각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시대의 변화를 읽어야 한다. 지금의 포스트 모던 시대 가운데 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한다. 문화 가운데 일하시는 성령께서는 교회가 시대에 적합하면서 그 사명을 다하도록 지혜를 주실 것이다. 이머징 처치는 바로 시대의 요청에 부합하게 하려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가장 암울할 때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 천의 선지자를 남겨 두셨듯이 21세기 가운데도 새로운 운동을 통하여 천국 복음을 세상 가운데 전할 주님의 교회를 계속 일으키고 계심을 본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교회들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송기태 선교사(singasong62@hotmail.com) 미션 달라스 총무(www.missiondallas.org)의 글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큐티체조를 통한 GBS(그룹큐티)의 예

무리의 도와 제자의 도
마가복음 3:7-19

마음열기
사람들이 많이 모인 대중 집회에 참석해 본 적이 있습니까? 평소 드리는 예배와 그런 집회에서 드리는 예배에 차이점이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본문말씀 14일(화) 큐티

7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13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1. 군중과 제자
1)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의 뜨거운 열기와 많은 숫자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7-10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7절),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나아왔다(8절). 무리가 너무 많아서 작은 배를 띄워서 설교하실 정도였다(9절).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고치셨는데 그것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지려고 몰려 왔다(10절).

2) 각처에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나아온 이유는 무엇인가(8, 10절)?

그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아온 이유는 ① 그가 하신 큰 일(기적과 이적)을 들었기 때문이고 ② 자신들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함이었다.

3) 예수님은 따르는 군중들을 어떻게 대하셨는가(9절)? 예수님이 보이신 행동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듣고 군중들이 몰려들었을 때 예수님은 이들과 약간 거리를 두기 위해 배를 띄우고 앉으셨다. 예수님은 육신의 필요 때문에 아우성치는 군중을 불쌍히 여기시고 병을 고쳐 주셨지만(마 4:23), 우리가 순간적인 기적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크고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복음의 내용에 더욱 집중하기를 원하신다.

4)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를 뒤로한 채 산으로 오르신 후 열두 제자를 따로 부르셨다(13절). 당신은 인간적인 필요 때문에 예수님을 찾고 있는 군중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 부름 받은 제자인가?

2. 제자의 특징
5) 예수님의 제자들(13절)이 수많은 무리(7절)와 대조되는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눅 6:12 참조)?

눅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누가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밤새도록 기도하셨음을 언급한다(눅 6:12). 즉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뜻대로 선택된 사람들이다. 제자 됨의 주도권이 바로 하나님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리들은 자신들의 육신의 필요에 의해서 예수님께 몰려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거나,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메시지나 고난이 찾아오면 다시 돌아가게 된다.

6)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세우신 세 가지 이유는 무엇인가(14-15절)?

예수님과 ① 함께 있게 하시고, ② 보내사 전도하며 ③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기 위해서다.

7) 제자에게는 먼저 예수님과 함께하는 교제의 삶(Being)이 필요하다. 그리고 열정적인 복음전도와 능력 있는 사역(Doing)이 뒤따라야 한다. 제자도에 있어서 이 둘 사이의 균형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8)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 버려야 할 것과 더욱 힘써 따라야 할 것은 각각 무엇인가?

기도하기
함께 나눈 말씀을 통해 결단한 것이나 개인과 공동체의 중요한 기도제목을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나누고 함께 기도합시다.

<큐티를 눈으로 읽는 것 만으로도 좋지만, 큐티체조의 본문관찰 질문에 답을 하다보면 본문이해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컬러링 과정(표시하기)을 통해 ‘위로 하나님’, ‘아래로 인간’, ‘물어봐’ 질문에 답을 하고, 저널링 과정인(묵상하기, 이해하기) ‘느껴봐’를 통해 도전주신 말씀, 나의 상황, 기대하는 변화를 따라 소감을 쓰고, ‘옆으로 실천해’를 통해 구체적인 실천을 따라 해보길 바랍니다.
큐티에 본문관찰은 분문이해와 삶으로 적용하기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므로 관찰질문에 답을 써보는 것은 큐티를 눈으로만 보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Quiet Time에 그림을 참조하시면 도움이 더 될듯합니다.

MBTI의 E와 I에 관하여

유진 박의 크리스천 신혼 일기
골방남과 광장녀
박유진 – 카피라이터(Let it flow)

회사에서 집까지 한 시간 반을 만원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곧 남편을 만날 생각에 그렇게 신이 났다. 남편이 늦는 날에도 하루 동안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 생각에 기다리는 게 마냥 즐거웠다. 몇 시에 와? 출발했어? 지금 어느 역이야? 문자를 수없이 날리다 보면 문밖으로 발소리가 들린다.

“남펴어어언∼∼, 어서 와!!!!”

아침에 보고 밤에 봐도 또 반가운 우리는 신혼부부. 들어오자마자 오늘 하루 수고를 치하하는 뜨거운 포옹을 날린다. 저녁 뭐 먹었어? 올 때 지하철에서 앉아 왔어? 어디서부터 앉아 왔어?! 나 지하철에서 누구 만났는지 알아?!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너무 많다.
그런데 빨간 미니 소파에 널부러지는 남편의 반응이 영 시원찮다.

“저기, 있잖아, 나, 잠깐만 쉴게.”

“……어? 그럼 그럼, 쉬어야지. 뭐 마실래? 주스 줄까??

음료수를 내밀다 보니까, 잠깐, 뭔가 반가움의 온도가 다르다는 생각에 뾰로퉁해진다. “뭐야, 내가 안 반가워?!” 남편, 한참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연다.

“내가 사실은 집에 들어오는 순간에는 에너지가 하나도 없어. 그래서 너를 충분히 반가워해줄 수가 없어…”

뭬야아앗! 뭐시라? 아니 반가워해주는 것에 무슨 에너지가 필요하다구? 아니 내가 꽃가루를 뿌리랬나, 현수막을 걸랬나, 그, 그냥 반가워하는 게… 힘들어? 우리 신혼인데?!!! 나, 이 결혼…잘못한 거야? 마음이 식었어? 나 사랑한다고 한 거 다 거짓이었어?!!!

1초 만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나를 보더니 남편이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아 이야기한다. “아니, 나는 네가 반갑지. 그런데 충분히 그 마음만큼 반가워해 줄 에너지가 없다구. 생각해봐, 나는 저녁 내내 모임에 회의에 사람들 계속 만나다가 지하철에서도 계속 사람들 많은 데 있다가 집에 들어오면 에너지가 다 바닥나 있는 상태라구. 그런데 너는 에너지도 많은 애가 하루 동안 있었던 얘기를 너무 하고 싶어 하잖아. 그걸 내가 충분히 받아주려면 잠깐 다시 충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야. 나, 극 I성향(MBTI)이잖아.”

같은 공동체에서 섬기면서 익히 알았던 바, 우리는 극단의 내향성과 외향성을 가진 사람끼리의 만남이었다. 나는 한마디로 광장녀, 그는 골방남. 연애 때도 남의 결혼식에만 가면 그날은 꼭 다퉜는데,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을 만나는 나는 에너지가 충천해서 식장과 피로연장 곳곳을 날아다니는 반면, 그는 곧 그 광장의 에너지에 모든 힘을 빼앗기고 비실비실 구석탱이 화환들 옆에 앉아서 “빨리 가자.. 빨리 가자..” 경을 외우면서, 갈 생각이 전혀 없는 나의 종횡무진을 보며 한숨을 푹푹 쉬곤 했다.

“그, 그럼 나더러 어떻게 하라구…?”

다행히도 기질 차이에 대한 선이해 덕에 일단 대화의 파국(?)을 막을 수 있었다. 남편은 으흠∼하더니 다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뭐든 일단 말을 하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나로서는 또 답답∼해지는 순간.
하긴 이 남자, 결혼한 지 두 달밖에 안 되었을 때, 그렇게 말했었지.

“혼자 있는 공간이 없어서 힘들어…”

우리 신혼집은 원룸 오피스텔이었다.

그날 이후,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남편이 먼저 들어온 날은 혼자 쉴 시간이 있으니 상관이 없었고, 나보다 늦게 들어오는 날에는 그가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15분 동안 “왔어?” 이외의 별다른 말을 걸지 않고 내버려 둠으로 충전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리고 침묵의 15분이 지나면 다시 뜨거운 재회의 포옹부터 시작하는 거다. 수고했어!! 오늘 별 일 없었어?! 내가, 내가 오늘은!!! 나로서는 기다려온 시간을 15분 유예함으로써 기다리던 반응 - 충분히 마음껏 반가워하는 - 을 얻으니 크게 손해도 아니었다. 잠깐씩 그의 조용한, 혼자만의 충전시간을 지켜주는 것으로 우리의 알콩달콩 신혼라이프는 다시 돌아왔다. 젖과 꿀이 흐르는 신혼의 가나안에도 광장과 골방의 큰 강은 존재했다. 그때 우리는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그 강을 건넜던 것 같다.